鄭煥悳
1. 소개
구한말의 역술인. 본관은 연일 정씨다. 호는 퇴산(退山)이다.2. 생애
경상도 영양군 출신이다. 40살이 되도록 과거 급제를 하지 못해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젊어서 배운 역술로 출세하기를 결심해 한양으로 상경했다. 그는 한양에 올라와 아는 사람들을 통해 인사청탁을 했고, 당시 전화과장인 이재찬의 눈에 들었다. 이재찬은 고종에게 "국가의 흥망성쇠와 인생의 길흉화복에 통달한 인물"이라 소개했다.광무 1년(1901년) 11월 27일 정환덕은 고종을 알현했다. 아무리 괴력난신을 멀리한다는 성리학 국가의 군주였다지만, 고종은 즉위 초기 점술에 일가견이 있던 왕후 민씨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고, 본인도 목숨이 오가는 경험을 여러 차례 했던지라 점술이나 역술을 매우 신봉하여 역술인을 자주 궁에 불러들이고 있었다. 고종은 인사말을 나눈 후 정환덕에게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500년으로 한정하였고 종묘의 이름을 창엽(蒼葉)이라 썼다. 창蒼이란 글자는 이십팔군(二十八君)이 되고 엽(葉)이란 글자는(二十世)를 형상한 듯하다. 국가의 꽉 막힌 운수가 과연 이와 같은가"며 당시 떠돌던 도참설에 대해 질문했다.[1]
이때 정환덕은 "국가 운수에 어찌 정한 것이 있겠습니까? 만약 전하께서 성덕을 베푸신다면 500년 아니라 천 년도 가할 것이고 , 전하께서 나쁜 정치를 하신다면 하루만에 잃을 것입니다. 그러나 폐하의 운수는 정유년(1897년)부터 11년의 한계가 있습니다. 이 운수는 모면하지 못할 것입니다."[2]라 말했다. 그러나 정환덕은 고종이 가장 알고 싶어하는 부분인 꽉 막힌 운수를 피할 방법에 대해 "인재를 얻는 방법밖엔 없습니다"란 원론적인 대답만 해 고종을 실망시켰다.
그후 고종은 한번 더 정환덕을 불러 왕조의 운수에 대해 물었으나, 정환덕은 원론적인 대답만 한 후 "12월 그믐에 화재의 염려가 있다"란 말만 한 후 물러났다. 이날 이후 고종은 정환덕에 실망해 더 이상 부르지 않았으나 12월 그믐에 화재가 나자 정환덕을 다시 상기한 고종은 1902년 1월 7일 경운궁 함녕전으로 다시 정환덕을 불렀다.
고종은 "나라의 종묘사직에 대해 임금인 나도 알지 못하겠는데, 이런 것을 들을 수 있겠는가"하고 재차 물었다. 정환덕은 이에 망한다고 하지 않고 잘하면 더 좋아질 수 있다는 식의 답변을 올렸다. 이후 고종은 정환덕이 하는 말은 대부분 들었고, 역술인 정환덕은 황제의 측근 자문관이 되었다. [3]
1902년 1월 14일 현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다음날 사임하였다. 같은 해 6월 29일 9품 통신사전화과주사(通信司電話課主事)에 임명되었고, 10월 9일에는 6품 승훈랑(承訓郞)으로 승차하였다. 11월 25일에는 시종원시종(侍從院侍從)에 임명되었다. \1905년 10월 18일 정3품 대흥군수에 임명되었으나 12월 26일 역시 사임했다. 다음 해인 1906년 3월 21일 종2품 시종원부경이 되었다. 같은 해 1906년 사직 상소를 내고 벼슬에서 물러났고, 1944년 8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정환덕은 관직에 있을 당시 궁 안에서 듣고 본 온갖 일들을 『남가록』이란 책에 기술했는데 이 책에는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궁중 비사가 적혀있다. 타 사료와 교차검증이 되는 내용도 있고 전혀 엉뚱한 내용도 있기에 신뢰성이 아주 높지는 않고 이로 인해 잘 인용되지도 않지만, 궁궐 내부자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가치를 지닌다.
[1]
이때쯤 고종은 망국의 기운을 짙게 느끼며 심신이 지쳐 있었고, 만약 망국이
운명이라면 어느 정도 체념할 심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
과연 정환덕의 예언대로 고종은
헤이그 특사로 인해 1907년 강제퇴위를 당하게 된다.
[3]
어찌보면 이것은 고종의 전근대적인 사고라 볼 수 있다. 그는 근대적인 문물에 전혀 무지하진 않았지만, 세상을 떠난 부인처럼 전근대적인 사고와 가치관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게다가 명색이 국왕이면서도 '종묘사직의 미래를 알지 못한다'며 역술인에게 호소하는 모양새는 현명한 유교 군주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