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경옥(景玉) / 산해(山海) |
본관 | 담양 전씨[1] |
출생 | 1897년[2] 11월 19일 |
강원도 울진군 상군면 가원동 (현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고성리 가원동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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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0년 2월 4일[3] |
경상북도 울진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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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전찬걸 현 울진군수는 사촌 동생인 전영근(田永瑾)의 장손자로, 전영경에게는 재종손자가 된다.
2. 생애
전영경은 1897년 11월 19일 강원도 울진군 상군면 가원동(현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고성리 가원동마을)에서 아버지 전유석(田裕錫)과 어머니 울진 장씨 장영화(張永華)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전희석(田禧錫)에 입양되었다.그는 1919년 3.1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발발하자 함경남도 원산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곽명리(郭明里) 등 12명의 동지와 더불어 수천명의 군중을 주도하며 만세시위운동을 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3개월간 고문을 받은 뒤 출옥한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장식(張植)·전영직(田永稷)·이우영(李愚榮) 등과 함께 울진청년회(蔚珍靑年會)를 조직하여 전영직이 회장을 맡고 그는 총무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동회는 매월 한 차례씩 월례회를 개최하고 기관지로 <울진청년회보>를 간행했다.
1920년 8월 29일, 전영경은 국치일을 기념하여 항일의 정신을 다지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7일 동안 구금당하였다. 이후 울진청년회는 1921년 집행위원제로 기구를 개편하여 그가 집행위원장을 맡아 동회를 이끌었다. 또한 전영직·임원화(林元華)·장인환(張仁煥) 등의 동지들과 함께 1922년 4월 17일 울진강습소를 설치하여 청소년들에게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동 강습소는 1925년 울진 제동학교(濟東學校)로 승격되어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1923년 7월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파견된 안희제를 도와 군자금 330원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송금하였으며 1924년 조선형평사(朝鮮衡平社) 울진지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1926년 만주에서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에 가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펴다가 1927년 3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28년 10월 5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았으나 1년 1월 15일형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1년 울진에서 윤두현(尹斗鉉)·진기열(陳基烈)·남일성(南日星)·주진황(朱鎭晃) 등 10여명의 동지와 함께 조선독립공작당(朝鮮獨立工作黨)과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고 동지규합에 힘썼으며, 각 리에 야학을 설치하여 사회주의 사상 및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1934년 2월 잔치집에서 '독립행진가'·'혁명가' 등을 고창하며 독립정신을 고취하던 중 경찰에게 탐지되어 동지인 전범수(田範秀)의 집이 수색당한 결과 〈농민조합선언강령〉등의 문서가 발각됨으로 인하여 조직이 노출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동지들과 함께 또다시 체포되었고, 1935년 7월 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울진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0년 2월 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전영경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12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