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제1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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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0000><colcolor=#fff,#dddddd> 장타이레이 張太雷 | Zhang Tailei |
|
본명 |
장젠그랑 張曾讓 |
한국식 독을 | 장태뢰 |
출생 | 1896년 6월 |
청나라 장쑤성 창저우시 | |
사망 | 1927년 12월 12일 (향년 29세) |
중화민국 광둥성 광저우시 | |
국적 | 중화민국 |
가족 | 이름 (관계) |
학력 |
창저우 서부 교외 2급 초등학교 (졸업) 베이징대학교 (법학과) -> 북양대학교 (법정학과) |
종교 | 무신론 |
직업 | 정치인 |
소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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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의 공산주의자 정치인.2. 생애
2.1. 초년기
장타이레이는 1898년 중국 장쑤성 창저우에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어린 시절부터 고생을 많이 했고, 8세에 아버지를 병으로 잃었다. 어머니는 바느질로 소득을 올려 장타이레이와 그의 누이를 홀로 키웠다.1906년 가을, 장타이레이는 서교 2급 소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당시 학비는 월 0.3위안으로 매우 저렴했지만, 형편이 너무나 가난한지라 어머니가 이를 감당할 수 없었다. 다행히 친척들의 도움으로 그는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학업에 전념해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의 우수한 성적을 본 교장은 그가 창저우 푸중 중학교에 입학하도록 후원했다. 1911년 신해혁명 동안 그는 거리 선전과 군사 훈련에 참여했다. 1915년 12월, 북경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텐진 북양대학교 법정학과로 옮겨 공부하면서 번역가로 일했다.
2.2. 공산주의를 접하다
입학 후, 장타이레이는 교내 근로장학생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1918년, 북양대학 법과 책임자인 포크스가 창간한 《화북성명보》에서 번역과 편집 업무를 맡아 생활비를 벌었고, 남는 돈으로 가족을 돕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러시아 공산당원 바오리웨이를 만나 영어 통역을 하며 마르크스주의 문헌을 접했다. 이 경험은 그가 이후 베이징대학 마르크스학설연구회에 가입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1919년 5.4 운동 때 텐진학생연맹 대표로 북경에 가서 리다자오(大来) 등을 만나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1920년 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대표 웨이진스키가 중국을 방문해 리다자오, 천두슈와 함께 공산당 창당 문제를 논의했고, 장타이레이가 통역을 맡았다. 그 후 그는 베이징에서 공산당 그룹에 합류했고, 1921년 2월, 극도로 추운 러시아 극동에서 상인으로 변장한 그는 국제극동국 중국부 서기로 소련 러시아에 파견되며 중국 공산주의 첫 외교 특사가 되었다.
막 러시아에 도착한 장타이레이 역시 생활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에게는 진흙과 풀 맛이 나는 제한된 양의 검은 빵밖에 제공될 수 없었고 그의 급여도 매우 높았다.[1] 1921년 8월 장타이레이는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 막 참석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대표 마린의 통역으로 일했다. 곧 장타이레이는 마린과 함께 쑨원을 만난 후 모스크바로 가서 극동에서 공산주의 회의를 소집하면 민족혁명의 성격을 강조하고 정치적 통찰력을 보여야 한다고 레닌에게 제안했다.
이듬해 그는 중국 공산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중국으로 돌아왔다. 1923년 봄, 그는 쑨원의 임명을 받아 장개석 등 5명과 함께 대표단을 구성해 소련을 방문했다.
1925년 1월, 중국으로 돌아온 장타이레이는 사회주의청년동맹 '제3차 대회'를 주재했고, 회의에서 연맹의 명칭을 공산청년동맹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또한 연맹 중앙위원회의 비서직을 역임했다. 그 후 장타이레이는 광저우로 가서 소련 국민정부 고문인 미하일 보로딘의 통역관을 맡았고, 중국 공산당 광동구위원회 선전부장도 역임했다.
2.3. 광저우 폭동과 사망
1927년 상하이에서 일어난 4.12 쿠데타 이후 국민당 난징 정부는 수배 명단을 발표했는데, 장타이레이도 그중 하나였다.1927년 봄, 그는 중국공산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혁명이 실패하고 진덕수가 사임하는 결정적인 시기에 장타이레이, 저우언라이 등 5명이 중앙상무위원회를 구성해 전당을 영도했다. 9월에는 중앙위원회를 대표하여 광둥성 조주로 달려가 난창 봉기군을 맞이했다. 봉기군이 실패하자 장타이레이는 대피 작전을 마련한 후 상하이로 돌아와 중앙 정부에 보고했고, 즉시 광저우로 돌아와 광저우 폭동을 주도했다. 광저우 노농민주정부가 선포되고, 장태레이가 정부수석대행을 맡았다. 폭동을 준비하는 열흘의 기간 동안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와 하천지류를 달리며 선실과 다리 밑, 소극장에서 각종 집회를 열었으며 교단의 로동자들, 장교, 병사들을 몸소 동원했다.
광저우 폭동 당시 모든 업무는 장타레이가 주도했고, 그는 2~3일 연속으로 깨어 있었다. 12월 12일, 시 밖과 일부 거리에서 요란한 총격이 일어났지만 장타이레이는 소련 정부 창립회의를 열고 대중에게 연설을 했다. 오후가 되어서야 회의가 끝났고, 그는 차를 타고 가던 중 적의 총에 맞아 숨졌다. 장타이레이가 사망하자 봉기 전체가 지휘권을 잃었고, 12월 13일 교육연대만이 철수하여 하이루펑으로 향했다.
3. 여담
[1]
장타이레이는 돈을 싫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