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2-31 02:34:31

장자온

張子溫
(? ~ 1388)

고려 말기의 인물.

1364년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이공수의 수행원으로 부령을 지냈고 가을 9월에 호군을 지내 원나라에서 고려 조정으로 돌아와 원나라에서 왕을 복위시키면서 최유를 원나라로 압송하게 했다는 것을 보고했으며, 이로 인해 공민왕으로부터 각종 물품을 하사받고 상호군에 임명되었다.

1367년 5월에는 코케 테무르가 보낸 사신의 방문에 대한 답례로 코케 테무르에게 파견되었으며, 1368년 겨울 11월에 예의판서를 지내면서 주원장에게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명나라에서 특별히 음악으로 대접하는 것이라 생색내자 명나라의 대부와 음악에 대한 문답을 나누었다. 이로 인해 예악의 근본을 알아 음악을 쓸 필요가 없겠다면서 후한 대접을 받았으며, 이 때 사건에 대한 평가에서 장자온이 시정의 사람인데도 타국에서 존중받아 한때 명예를 얻었다는 말을 했다.

1369년 가을 8월에는 공부상서를 지내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신년을 축하하면서 명나라 조정에 축하할 때 필요한 의례규범을 내려달라고 했으며, 1370년 여름 6월에 주원장이 준 책 조하의주와 함께 조하의, 금룡저사를 가지고 고려 조정으로 돌아왔고 12월에는 예부상서를 지내다가 진변도호부 안무사로 임명되었다.

1372년 봄 3월에는 민부상서를 지내면서 명나라의 말 독촉으로 인해 남경으로 가서 탐라의 몽골인들을 토벌할 것을 주청했으며, 가을 9월에서 명나라가 내린 조서를 가지고 고려 조정으로 돌아왔고 겨울 11월에는 판서를 지내면서 요동으로 파견되었다. 1374년 11월에 밀직사를 지내 민백훤과 함께 공민왕의 죽음을 알리고 시호를 내려 우왕의 왕위계승을 승인받기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김의가 명나라 사신을 죽이거나 납치하는 일이 발생하자 도망쳐 고려 조정으로 돌아왔다.

1385년 2월에 한양윤을 지내다가 마을 거리를 돌아다니던 우왕에게 말을 빼앗겼으며, 북원에서 고려로 사신을 보내 명나라에서 여진족을 보내 사신을 잡으려고 한 일이 있어서 김득겸이 여진족을 공격해 물러나게 하면서 명나라로부터 문책을 받자 이를 무마하는 과정에서 장자온은 명나라의 사신에게 금, 은을 줬다. 가을 9월에 태묘에 우왕이 황제가 올린 조서를 베껴낸 뒤에 제사지내면서 이를 불태워 없애는 분황을 했는데, 구홍이 제사에 쓸 고기를 주탁에게 가져가려다가 주탁이 식사중이라 부엌에 두고 그냥 돌아온 일로 인해 주탁이 노하면서 구홍을 죽여야 한다고 하자 구홍을 위해 변명을 했다.

10월에는 찬성사를 지내면서 우현보, 하륜 등과 함께 명나라에 은혜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파견되면서 책력, 부절을 줄 것을 요청했으며, 1386년 3월에 조민수, 우현보, 하륜, 심덕부, 임헌, 김자앙 등과 함께 책력, 수륙 통행증 8장을 가지고 고려 조정으로 돌아왔다.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1388년에 고려에서 보낸 말에 하자가 있다는 이유로 금의위에 갇혔다가 사망했다.

정도전에서 극 초반 이인임의 수하로 나온다. 배역은 김익태. 실제 역사와는 달리 극 중반 이후 자연스럽게 하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