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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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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裔
(?[1] ~ 230)
1. 개요2. 생애3. 장예의 나이?4. 창작물에서

1. 개요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로 자는 군사(君嗣). 촉군의 장씨로서 권면갑족(冠冕甲族)에 들었고 유교경전에 능했다. 익주 촉군 성도현 사람.

2. 생애

춘추공양전, 사기, 한서 등을 연구했다. 허정이 촉으로 들어갔을 무렵 장예는 실무를 잘 처리하고 민첩하여 익주목 유장에게 효렴으로 발탁되어 그를 섬기고 어복현장, 종사 겸 장하사마를 지냈으며, 익주를 공격하는 유비를 구원하기 위해 장비가 형주에서 진군하자 군대를 이끌고 덕양현 맥하에서 싸웠지만 패했다. 그는 유비에게 유장의 사자로 갔는데 유비는 유장을 예우하고 익주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것을 약속했다. 결국 유장이 유비에게 항복하자 유비를 섬기고 파군태수, 사금중랑장으로 임명되어 농기구와 무기의 제조를 맡았다.

익주 태수였던 정앙이 현지의 호족이었던 옹개에게 살해되자 그 후임으로 익주 태수가 되었다. 옹개는 손권과 내통하고 있었는데 장예를 만나지도 않고 귀신의 힘을 빌려 말하길 장예는 겉은 번지르르 하지만 속은 그렇지 못하니 죽일 가치도 없다며 그를 잡아 손권에게 보냈다. 장예는 오나라에서 몇년간 숨어 다녔다.

이 후 양국의 우호 관계를 위해 제갈량 등지 오나라에 사자로 파견했고 장예의 석방 협상을 해 귀환을 허락받았다. 손권은 그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장예가 촉나라로 떠나려고 할 때 한 번 이야기했는데, 손권은 웃으며 환담하고 즐거워했으며, 장예를 훌륭한 인물감으로 생각했다. 장예는 궁문을 빠져나간 후, 어리석은 모습으로 가장 할 수 없었던 것을 깊이 후회하고, 즉시 배를 타고 두 배의 속도로 밤낮을 겸하여 질주했다. 손권은 과연 장예를 추격했지만, 장예는 벌써 영안현의 경계에서 몇 십 리 들어갔으므로, 추격하는 자들은 미칠 수 없었다.

그는 돌아온 후에도 다시 중용되어 참군, 익주치중종사가 되어 제갈량을 보좌하며 승상부의 일을 맡았으며, 227년에 제갈량이 북벌을 위해 한중에 주둔할 때 장예는 사성교위, 유부장사로 임명되었다. 장예는 북쪽의 제갈량에게로 가서 일을 상의했는데, 전송하는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고 거마는 도로를 가득 메웠다. 장예는 이후 하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행했는데 휴식 취할 틈도 없이 수많은 손님들을 영접하느라고 죽도록 피곤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당시 제갈량은 일년 내내 밖에 있었기 때문에, 상부의 최고 결재권은 항상 장예가 쥐고 있었다.[2] 이후 장사 직분을 유지하면서 보한장군을 겸했으나 23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담소는 해학스럽고 유창했다. 또, 제갈량을 칭찬한 것이 장예전, 자치통감에도 남아있다. 제갈량/평가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갈량이 북쪽으로 정벌나가 한중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장예를 유부장사로 임명하려고 장예와 어릴적부터 친했던 양홍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 양홍이 대답했다.
장예는 선천적으로 명찰하여 긴급한 일을 처리함에 있어 뛰어나며, 그의 재능은 이 일을 담당할 수 있지만, 성격이 공평하지 못하여 그 혼자 완전하게 맡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상랑을 남기는 것만 못합니다. 상랑은 겉과 속의 차이가 적으므로 장예를 그 아래에서 따르게 하여 그의 재능을 발휘하게 한다면 일거양득일 것입니다."

당초 양홍은 장예가 다스리던 군을 다스리게 되면서 장예의 아들 장욱을 사사로운 실수에도 개의치 않고 처벌했고 이 때문에 장예는 양홍과 사이가 틀어졌는데 나중에는 사염교위 잠술과도 화합하지 못하고 원한을 갖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제갈량이 장예에게 편지를 보내서 "나는 그대와는 옛날부터 돌같은 굳은 우의를 맺고 있다고 생각해왔소. 제발 좀 받아들이면 안 되겠소?"라고 편지를 보내기까지 했다. 은근히 뒤끝이 강한 사람이었던듯 하다. 어쨌거나 이런 말에도 유부장사로 임명되어 승상부의 최고 결제권자가 된 것을 보면 실무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던 듯 하다.

그래도 개인적인 사람됨은 의롭고 정이 많았던 듯 하다. 그는 건위 사람 양공[3]과 사이좋게 지냈었는데 양공이 요절하자 그의 어린 고아를 맞아들여 머물게 하고, 방을 나누어 주어 살도록 했으며, 양공의 모친은 자신의 모친처럼 모셨다. 또 양공의 아들이 성장하자 아내를 맞게 하고 집과 전답을 사주어 일가를 이루게 했다. 이런식으로 장예는 옛 친구들을 의리있게 대했고 곤궁한 처지의 친척들을 도왔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이륜행실도에도 장예휼고(張裔恤孤: 장예가 고아를 구제하다)라는 제목으로 이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계한보신찬의 평가로는 장군사를 찬함(贊張君嗣)이라는 문장에서 '총명하고 기민하며 자애로웠다. 장래의 생각을 말하고, 절실한 물음에 근접하게 대답하였으며, 시대의 미덕을 돕고, 우리 공업을 화합시켰다'고 한다.

제갈량의 푸시를 받아 가면서 승상부 유부장사까지 오른 장예는 좌거기장군 장익과 함께 권력의 핵심에 접근한 익주 출신의 일례 중 하나이다. 장예는 장완과 함께 제갈량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권력핵심에 접근했고 장익 역시 군권의 핵심부에서 강유와 연관성이 강했던 만큼 익주인으로서 권력의 핵심에 접근한 대표적 사례인 것이다. 직위를 보면 유부장사(원정나간 승상의 대리역) 장예는 참군이자 후일 제갈량의 후계자인 장완보다도 더욱 권력핵심에 접근했다고도 볼 수 있고 유사시 제갈량 다음으로 조정을 이끌 당사자였다. 당시 양홍은 촉군 태수로서 줄곧 2천석군 태수의 관계였고, 지방관 중에서도 으뜸이라 할 수 있었는데 양홍 역시 익주인이었으므로 건흥 초기 중앙과 지방은 익주민이 권력의 핵심에 있었다.
손권과 장예가 대화를 나눈 내용은 정사 뿐만 아니라 세설신어에도 실려있다.

아들 장목이 뒤를 이었다. 장목은 말이 빠르고 거친 바가 있어 이를 고치고자 자림(字林)을 보며 생각을 정갈히 가다듬으라고 했다. 장목은 삼군의 군수와 감군을 역임했다. 장목의 동생 장욱은 태자중서자가 됐다.

3. 장예의 나이?

장예전에 이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손권: 그대는 돌아가면 반드시 서쪽의 촉나라 조정에 기용될 것이며, 결코 시골 마을의 농부는 되지 않을 것이오. 장차 나에게 어떻게 보답하겠소?
장예: 저는 죄를 짓고 돌아가므로 생명을 관리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만일 은총을 입어 다행히 생명을 보존하게 된다면, 58세 이전까지는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목숨이고, 이 이후로부터는 대왕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 일화가 건흥 원년인 223년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추정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것으로 확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손권은 촉한에 장예라는 고위급 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애써 만류하려 했지만, 장예는 촉한으로 귀환하려 했다. 손권에 보답한다는 얘기는 당연히 한시라도 빨리 몸을 빼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에는 배를 타고 빠져나갈 때 어리석은 척 연기를 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며 노를 빨리 저어서 도망갔고, 손권이 보낸 추격대가 뒤늦게 이르렀지만 그때 장예는 이미 영안 수십 리에 이르러서 추격하던 군대가 더는 따라올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손권이 자신을 수하로 두고 싶어 한다는 장예의 통찰을 확인시켜 준다. '손권이 과연 추격했다'는 손권이 처음에는 '장예의 58세 이야기' 약속을 장예가 언젠가 손권에게로 돌아가 대왕께 받은 시간을 보답하겠다고 말하는 유예, 혹은 구두수표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장예는 오나라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거짓말로 손권에게 58세가 되면 내가 너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말한 것이지, 자신의 나이를 말한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후 손권은 장예의 말에서 오나라로 다시 돌아올 마음이 없다는 뜻을 유추하고 곧장 자신의 수하로 두기 위해 추격대를 보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장예는 58세보단 젊었을 공산이 크다.[4]

다시 장예의 나이로 돌아가서 문제 해결의 출발점은 장예가 유장이 익주를 통치하던 시절에 효렴이 되었다는 것이다.​ 유장은 194년부터 214년까지 익주목의 위치로 익주를 다스렸는데, 211년부터 유비와 3년 동안 대치했을 당시 장예가 이미 유장 휘하에 있었으므로, 이 3년을 제외하면 194년에서 211년 사이가 된다. 당시 유력한 가문, 호족 출신들이 처음으로 효렴이 되는 연령대가 어느 정도인지 따져 보면 다음과 같다.
  • 조조(155년생)는 희평 3년(174년)에 20세로 효렴이 되었다.
  • 장소(156년생)는 희평 4년(175년)에 20세로 효렴이 되었다.
  • 순욱(163년생)은 영평 원년(189년)에 27세로 효렴이 되었다.
  • 양수(179년생)은 건안 연간(196년~220)년에 효렴이 되었고 곧바로 낭중으로 일하다가 조조가 승상이 되고(208년) 창조주부가 되었으므로 최소한 20대에 효렴이 되었다.
  • 손권(182년생)은 건안 원년(196년)에 15세의 나이에 효렴이 되었다.
  • 손광 또한 20세에 효렴과 무재에 천거되었다.
  • 정현의 아들 정익이 23세가 되었을 때 공융이 그를 효렴에 추천했다.
  • 왕륜이 20여 세에 효렴으로 꼽혔지만 가지 않았다.
대략 10대 중후반~20대 중후반에(15~27세) 효렴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장예는 촉군의 대성호족인 촉군 장씨였으니 그 역시 이른 나이에 효렴으로 천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효렴이 되기 앞서서 허정이 촉에 들어오는데 손책이 허정과 왕랑을 바다로 내쫒은게 195년경이고 이후 교지에 도착하자, 교지태수 사섭이 후하게 대우했다. 진국의 원휘가 이때 교주에 의탁하여 머물고 있었는데, 원휘는 상서령 순욱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허정을 높이 평가했다. 순욱이 상서령이 된 것은 건안 초인 196년이므로 최소 허정이 196년에 교주에 도착한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조에게 편지를 보내 (당시에는 이민족의 땅으로 인식되던) 교주로 도망친지 10년이 되었다고 했다. 따라서 이때는 206년경이 되었을 것이다. 그 후에 허정이 유장의 초청을 받아 촉에 들어오는데, 유장은 촉으로 들어간 허정을 파군, 광한태수로 임명했고 211년 죽은 왕상의 뒤를 이어 촉군태수로 임명했으므로 211년에 허정이 익주에 들어왔을리는 없으니 허정이 206년~210년 사이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장예가 이른 나이에 효렴이 되었다면 206년~210년에 효렴에 천거되었다는 말이 된다. 206년으로 잡아서 27세에 효렴이 되었다고 쳐도 180년생이고, 210년으로 잡아서 15세에 효렴이 되었다고 한다면 196년 생이다.[5]

여기에 추가로
장예가 오나라에서 유랑하고 있을무렵, 양홍이 장예가 다스리던 군으로 부임됐었다. 장예의 아들 장욱을 군리로 임명하고, 미소한 과실로 처벌을 받았을 때 특별히 용서한 적은 없었다.

장예가 유랑하고 있었을때 장성한 아들이 있었는데 장예전에 의하면 장욱은 차남[6]이라고 한다. 옹개가 장예를 내쫒은게 223년 이전이고 손권이 옹개와 손을 잡고 촉한의 남중을 교란한게 유비가 황제가 되었을 시점이니 221년~223년 경에 장예가 오나라에서 유랑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때쯤 군리 같은 하급 관직으로 임명될 만한 젊은 성인이라고 할 수 있는 10대 후반, 20대 쯤 되는 둘째 아들을 223년쯤에 두었다는 것이다. 한대의 악부인 <맥상상(陌上桑)>에는 '15세 소리(관청 서기), 20대 대부'라는 말이 있어 충분히 15세 쯤에 군관청의 소리로 임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앞서 장예가 효렴이 된 연도 계산을 추가하면 장예는 젊은 시절에 아들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대충 첫째 아들과 둘째가 나이 차가 크지 않아 터울이 마량-마속 형제처럼 3살쯤이라고 치고 양홍이 장예가 유랑하던 시점인 221년에 장예가 다스렸던 군으로 왔다고 가정하고 2년이 지난 223년 당시 둘째인 장욱을 넉넉 잡아서 17~20세 쯤으로 보자. 장예가 최대한 빨리 관례를 치룬 15세에 첫 아들을 가져 16세 쯤 첫 아들을 낳았다면 35세(188년생)~38세(185년생)일 것이고 20세 쯤에 첫아들을 두었다고 계산할시 40세(183년생)~43세(180년생)로 계산이 가능하다. 이는 대략 180년~188년생으로 즉 장예가 효렴으로 일찍 천거되었다면 그의 나이는 제갈량과 비슷하거나 조금 어리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이 모든것은 가정을 두고 쓴 것인 만큼 확답은 어렵지만 말이다.

4. 창작물에서

파일:장예.jpg
삼국지 14 일러스트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14부터 등장하고 능력치는 통솔 66, 무력 43, 지력 67, 정치 76, 매력 68이며 일러스트는 묘하게 장송 같이 생겼는데 자세히 보면 오른손을 올리고 있다. 개성은 발명, 농정, 능리, 주의는 예교, 정책은 수군육성 Lv 3, 진형은 방원, 충차, 전법은 매성, 충차, 구축, 친애무장은 제갈량, 혐오무장은 양홍이다. 생년은 166년으로 설정되어 있어 장예의 58살 이전 운운이 졸지에 1살 먹기전에 도망치는 꼴이 되었다.


[1] 건흥 원년에 등지의 도움으로 촉으로 귀환하게 되었을때 어떻게 보답하겠느냐는 손권의 말에 "저는 죄를 짓고 돌아가므로 생명을 관리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만일 은총을 입어 다행히 생명을 보존하게 된다면, 58세 이전까지는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목숨이고, 이 이후로부터는 대왕께서 주신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만약 당시에 58세였다면 역산해서 165년생이 된다. 그러나 장예의 자세한 나이에 대한 고찰은 장예의 나이 부분 참고. [2] 장완도 같이 일을 총괄했지만 장완은 참군이었던 반면 장예는 사성교위, 유부장사를 겸직하고 있었다. 장예가 죽고 나서야 장완이 장사가 된다. [3] 바로 위 일화의 양홍과 동일인물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둘 다 건위 사람이고 같은 양씨이고 홍(洪)과 공(恭)이 서로 비슷한 글자이기 때문에 '공'을 '홍'의 오기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4] 만약 장예가 진짜 58세인 상태에서 이런 약속을 했다면, 손권의 말대로 촉나라 조정에 기용되기 보단 그냥 거기서 죄를 받고 바로 오나라로 돌아오겠다는 뜻인데 이러면 손권이 그럼 그냥 여기서 나를 섬기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 있다. [5] 다만 이 경우엔 유장이 명장인 장비를 막으려고 19살 짜리를 보내 막으라고 한 꼴이 되므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206년에 효렴으로 천거된 180~183년생이라면 어복현장, 종사 겸 장하사마를 역임할 시간적 여유도 되고 장비를 막을 시점에 30대 초중반인 셈이니 적절한 나이대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6] 장남은 상술되었 듯이 말이 빠르고 거칠어서 아버지에게 충고를 들은 장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