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8 07:33:18

인종 폭동

1. 개요2. 재건시대 ~ 대공황
2.1. 흑인 대이동, 그리고 시작된 폭동2.2. 최악의 폭동: "털사 인종 학살"2.3. 이후
3. 뉴딜 ~ 세계대전4. 민권 운동기5. 레이건 시대 이후

1. 개요

20세기 초중반에 주로 일어났다. 흑인 대이동, 미국 흑인 민권 운동과 함께 미국 인종차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2. 재건시대 ~ 대공황

2.1. 흑인 대이동, 그리고 시작된 폭동

흑인 대이동을 통해 미국 남부에 90%가 거주하던 미국 흑인들이 북부, 서부, 동부의 대도시들로 이주하면서 초반에는 남부에서 차별받고 린치당하던 흑인들을 감싸주는 듯 했으나, 대이동을 통해 들어온 많은 흑인들이 기존에 거주하던 백인들과 갈등을 빚게 되고, 당시 만연하던 인종주의의 영향으로, 흑인들을 차별하기 시작했다.

또 당시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인해 파병간 백인 군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없는 동안 이주를 해온 남부 출신 미국 흑인들이 이들의 일자리를 차지하면서 돌아온 백인 군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 흑인들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았다"라며, 흑인에 대한 악감정을 표출하게 되고, 이를 빌미로 백인들은 폭동을 일으킨다.

백인들은 갓 이주를 해 터전을 잡고 있던 흑인들의 동네를 약탈하고 불태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을 마구 린치하고 살해하고 폭행하면서 흑인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1919년 여름에 특히 이런 폭동이 많이 일어났는데, 이를 붉은 여름이라고 한다.

전미에서 이런 폭동이 많이 일어났고 이 붉은 여름 사태 이후 미국 정부와 주 정부들은 인종 폭동을 근절하기 위해 인종 분리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기 시작했다.

백인의 인종 폭동은 주로 북부(중서부), 서부, 동부 주들에서 발생했다. 남부에선 인종 폭동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그건 남부의 흑인들은 이미 매일매일을 린치당하고 폭행 당했기 때문에... 매일매일이 인종폭동 참고로 남부 이외 지방에서도 끝난 줄 알았던 인종 폭동이 털사 인종 학살이라는 더 끔찍한 참사로 재현되며 미국의 흑인들을 더 암울하게 만들었다.

2.2. 최악의 폭동: "털사 인종 학살"

그러나 2년 뒤 미국 역사상 제일 참혹한 사건 중 하나인 털사 인종 학살이 발생했다.

사건 경위는 이러했다. 19살 흑인 구두 닦기 소년 딕 롤랜드는 최상층에 위치한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앨리베이터를 탑승하다가 혼자서 넘어지고 만다. 이에 딕 롤랜드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잡았는데, 그게 앨리베이터 운전원으로 근무 중이던 17살 백인 소녀 세라 페이지의 팔이었다. 놀란 세라 페이지가 소리를 지르자, 당시 자신들보다 훨씬 잘 사는 흑인 중산층/상류층을 아니꼽게 보았던 백인 시민들이 딕 롤랜드가 소녀를 성폭행 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우고[1] 그걸 빌미로 흑인들이 힘들게 일궈놓은 부와 재산을 다 불살랐다.

그리고 그 동네의 흑인 중산층과 상류층을 보이는 족족 학살하거나 고문하거나 린치했다. 이로 인해 300명 이상의 흑인이 학살당하고 8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으며 블랙 월 스트리트라고 불리던, 미국 전체에서 가장 부유한 흑인들이 거주하던 동네가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이 사건이 근처의 백인 시민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자행된 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이 백인 폭도(근처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자 사건 당사자인 세라 페이지가 딕 롤랜드는 아무 잘못이 없다며, 제발 그를 용서해 달라고 했지만 백인 폭도들은 그냥 무시했다.

2.3. 이후

털사에서 일어난 참사 이후 인종 분리 정책은 더 강해졌으며 이 인종 분리 정책은 30여 년 후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의 먼 원인이 된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백인에게 대든 흑인을 집단으로 린치해서 신체 절단 및 화형으로 죽이고, 그 시신을 나무에 매다는 일이 빈번했다. 린치는 수천 수만이 운집할 정도로 백인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그곳으로 향하는 특별 열차 배치 및 근처 학교 휴교 등 당국이 협조하기에 이르렀다. 린치 행사를 직관할 수 있는 티켓은 고가였음에도 늘 매진이었고, 수족 및 성기가 잘리거나 불에 타서 죽어가는 흑인의 목소리를 녹음한 테이프가 판매되기도 했다.

3. 뉴딜 ~ 세계대전

루스벨트 행정부가 집권한뒤 뉴딜 정책과 더불어 소외받던 흑인사회를 인종분리 철폐, 경제적 자립, 문화적 부흥 등 다방면에서 지원하기 시작했다.

연방정부 단위에선 인종분리 철폐가 진행된것과 별개로, 특히 남부에선 여전히 공공연히 린치가 계속 되는 상황이었다. 1956년 3월, 노스캐롤라이나의 샘 어빈 상원의원은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해 짐 크로우를 살려내기 위해 싸우겠다고 약속한 남부 선언 만들기도 했다.

4. 민권 운동기

이전 시기의 인종폭동이 주로 남부, 서부 지역에서 백인들의 주도하에 유색인종을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양상이었다면 민권 운동기 이후엔 중서부를 제외한 대도시 지역들이 인종 폭동의 주 무대가 되었다.

백인들의 주도하는 린칭등의 행위와는 별개로 인종분리 정책, 경찰 폭력등의 대한 반격으로 흑인들이 주도하에 게토 폭동 (Ghetto riots)으로 통칭되는 일련의 폭력 사태가 빈발하기 시작했다.

이시기 주요사건으로는 1967년의 길고 무더운 여름 (Long, hot summer of 1967), 킹 목사 암살로 일어난 킹 암살 폭동 (King assassination riots)등이 있었다.

동시기 일어난 68혁명과 반문화 운동, 베트남전 반전운동등으로 미국 사회 전체가 급격한 혼란과 변화를 겪는 시기 이에 대한 반동으로 조지 월리스등의 인종 분리주의자들은 법과 질서(Law and order)등의 구호를 내세우며 전국적으로 상당한 지지를 얻으며 정치판에 강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5. 레이건 시대 이후

민권시대 이후 공공연한 린칭, 인종분리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차별적인 인식이나 경제적 빈곤등의 문제가 해결된건 아니었고 이전 시기의 충돌이 기본적으로 백인 vs 소수인종의 구도였던것과 다르게 상대적으로 묻혔있던 소수인종 사이의 충돌이 표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사건들중 한국에도 알려진 사건으로는 루프 코리안 밈으로도 알려진 1992년 캘리포니아 폭동이 있다.

92년 캘리포니아 폭동 이후 대부분의 폭력 사태가 일시적, 국지적으로만 발생하며 대부분의 충돌이 수면 아래에 있었지만

2014년 퍼거슨 소요, 2020년 이후 계속되고 있는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 Black Lives Matter 등으로 인종 갈등이 전국적인 충돌 양상으로 정치적 현안으로 다시 부상했다.


[1] 당시 백인들이 흑인을 린치할때 가장 많이 써먹었던 수법 중 하나가 바로 흑인한테 강간 혐의를 뒤집어 씌우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