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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전의 이씨[1] |
출생 | 1874년 10월 30일 |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화산리 | |
사망 | 1905년 5월 12일 |
영국 런던 | |
서훈 |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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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이한응은 1874년 10월 30일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화산리에서 군수인 이경호(李璟鎬)의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다섯 살 때 한학을 배웠고, 1889년 서울로 상경해 관립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했다. 그는 육영공원에서 2년간 영어를 비롯하여 수학, 자연과학, 역사, 정치학 등 근대적 학문을 배우고 1891년에 졸업하였다. 1894년 왕세자의 20세 성년을 기념하는 특별과거(司馬試)의 시부(詩賦)에 응시하여 성균관 진사(進士)로 합격했다.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했다. 이때 부친 이경호가 남영우령관(南營右領官)을 맡아 동학군과 맞서다 전사했다. 이에 그는 3년상을 치른 뒤 1897년에 한성부 주사(主事)에 임명되었다. 1899년에는 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고, 1901년 런던 주재 대한제국 공사관의 참서관(參書官)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01년 4월 15일 한국을 출발해 6월 24일 런던에 도착했고, 퀸 빅토리아 스트리트에서 임시 거주했다가 1901년 8월 9일 대한제국공사관이 준비되자 그곳에 거주했다.
대한제국 주영공사관의 일상 업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주영공사관에는 공사 민영돈과 이기현(민영돈의 처남), 이한응 참서관, 민유식, 강기승, 또 윤이라는 사람 모두 6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주영공사 민영돈을 보좌하며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주영 한국명예총영사 모건은 이한응이 자살한 뒤 집필한 보고서에서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영국에 주재할 때 그 지위의 광영(光榮)을 잘 보존하였기 때문에 영국 외무부 및 기타 사회에서도 다른 각국 외교관과 더불어 조금도 차이가 없이 우대해 주었다.”
이로 볼 때, 그는 영국 외무부 관계자들과도 스스럼없이 친교하였으며, 외교계에도 잘 알려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한응 등은 영국 상류층 인사인 롤랜드 본 윌리엄스 경과 로라 본 윌리엄스 부인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등 상류층 인사들과 상당한 친분을 쌓고 있었다.
1904년 2월, 민영돈 주영공사는 해임되어 외부협판 박영하(朴榮夏)에게 주영공사직을 넘겨주고 귀국하였으나 박영하는 부임하지 않았다. 민영돈 주영공사가 해임된 이후 영사관 업무는 1904년 초부터 이한응이 대리공사로서 업무를 수행했다. 대리공사였으나 순국 후 정식공사로 추증되었다. 이한응은 그가 공사가 되었을 때 아직 만 30살도 되지 않았는데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한 나라의 대사를 역임한 사람이 되었다.
이한응은 ‘대리공사’ 직책을 맡은 직후인 1904년 1월 13일 영국 외무성을 방문하여 한반도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담은 장문의 메모와 함께 각서를 수교하였다. 그는 메모에서 한국의 독립이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데 필요 불가결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수 개의 도표를 통해 동아시아의 국제정치를 범세계적 차원의 세력 균형체제와 연결하여 설명했다.
이한응은 당시 세계정치의 구조를 4각형과 같다고 하였다. 서쪽(유럽)은 영국과 프랑스가 세력균형의 축을 이루고 있으며, 동아시아는 일본과 러시아가 세력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 서쪽의 영국 및 프랑스와 각각 동맹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동쪽에서의 균형이 앞으로 무너지면 서쪽의 균형도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다. 세력균형이 무너지면 전 세계적인 세계균형체제의 파괴로 이어질 것이다. 따라서 이한응은 영국과 프랑스는 심판자 역할을 하여 한반도에서 러·일 간의 분쟁을 조정해 달라는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심판관의 자격을 얻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양국이 일본-러시아와 함께 4개국조약(a quadruple treaty)을 체결함으로써, 한국, 중국, 만주를 보호하며, 가까운 장래에 전쟁의 위험을 제거, 세계평화와 동아시아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한응 공사는 영국정부에 자신의 한반도 중립화안을 담은 메모를 수교하는 한편으로, 적극적으로 영국 외교부와 접촉을 시도하였다. 1904년 1월 15일 영국 외무부 동아시아국 담당 차관보인 프랜시스 A. 캠벨에게 본국 정부로 전달하기 위해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리고 2월 19일에는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는 메모를 추가로 보냈다. 그는 이 메모에서 조만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것이며, 전쟁의 결과와 상관없이 한국의 독립, 주권, 영토 및 특권 보존을 위한 새로운 보장을 해줄 것을 영국정부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영국정부는 한국에게 새로운 보장을 줄 수 없음을 통보하였다. 이한응은 영국정부로부터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존을 위한 노력을 하였지만 영국의 지원을 얻을 수는 없었다. 이후 한국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일제는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한국의 주권에 제한을 가했다. 그리고 그해 8월 22일 일제의 강요에 의해 재정고문 1명과 일본이 추천하는 외교고문 1명을 초빙하며, 외교관계의 처리는 미리 일본정부와 협의를 거친다는 내용의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이한응은 자국 정부의 모든 통신망이 일제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주한영국공사관을 통해 대한제국 정부와 비밀리에 통신을 수행했다. 또한 그는 외신보도의 중요 기사들을 일지로 작성했다. 당시 이한응이 기록한 일지에는 대부분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움직이던 일본, 러시아, 영국 등의 국제적 동향이었다. 그만큼 이한응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촉각을 세워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04년 10월, 이한응은 영국 외무부를 방문하고 런던주재 한국공사 임명에 대해 협조를 부탁하였다. 그는 주한영국공사 J.N. 조던에게 전권 공사의 파견을 강력히 요청할 것을 영국 외무부에 부탁했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묵살되었고, 1905년 1월 무렵 러일전쟁의 향방이 일본의 승리로 굳어졌다. 이에 따라 영국은 영일동맹을 개정하기로 결정했고, 자연히 이한응의 호소는 더욱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도 이한응은 포기하지 않고 1905년 2월 8일 영국 외교부를 방문하여 동아시아국 고위관리 월터 랭글리에게 한국 독립보장 문제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본국과의 연락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중국 치푸(芝罘) 주재 영국총영사관을 통해 고종황제와의 연락을 하게 해달라고 하였지만, 이 또한 거절당하였다. 2월 26일에도 영국 외무부를 방문한 이한응 공사는 랭리를 만나 영일동맹에 의해 한국의 독립이 보존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또한 그는 1905년 3월 3일자로 영국 외무대신에게 대한제국 정부를 위해 거중조정(good office)을 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은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최종적으로 조정된 평화협정의 조건 중 하나의 형태로 한국의 영토 보존과 독립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끝내 이를 묵살하고 1905년 5월 11일 영일동맹의 개정조약 초안을 일본 정부와 교환했다. 이 초안은 1902년의 조약 내용에 있었던 한국의 독립 보장 관련 내용이 삭제된 것이었다.
이렇듯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이한응은 절망했다. 1905년 4월 중순, 이한응은 동아시아국 담당 차관보 캠벨에게 자신의 신변보호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4월 12일 오후 하이드 파크(Hyde Park)의 서펜타인 호(Serpentine Lake) 부근에 앉아있을 때에 두 명의 괴한이 자신의 목숨을 노렸다고 하였다. 이한응의 편지를 받은 영국 외무부는 내무부에 서신을 보내 그의 안전을 부탁하였고, 그래서 영국 경찰이 한국공사관을 찾아가는 등 안전 조치를 취하였다. 이 시기 이한응 공사는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면서 매우 위험한 상황에서 병이 났다. 5월 10일 이한응은 랜즈다운 영국 외무장관으로부터 쾌유를 비는 편지를 받았고, 5월 11일 아침 영국 외무부에 편지를 보내, 자신의 건강이 ‘빨리 회복(speedy recovery)’되었다고 답신하였다.
5월 11일 영국 외무부는 주한 영국공사에게 이한응 대리공사가 ‘음울증(陰鬱病)’을 앓아왔으며 자칫 발광(發狂)하여 움직이기만 해도 자살을 꾀할 우려가 있으니 즉시 귀국 조치하도록 한국정부와 교섭하라고 훈령했다. 또한 영국 외무부의 캠벨 차관보는 정부에 런던주재 일본공사가 “이한응이 미쳤다는 내용의 편지를 그의 이웃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들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5월 12일 아침, 이한응은 자신의 침실에서 창문 끈을 문 뒤에 핀에 걸어 목을 맨 채로 발견되었다. 그의 유해는 주영 명예총영사 모건에 의해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유해를 국내에 보낸 이후 모건이 보낸 1905년 5월 24일자 편지에는 말미에 “불쌍한 친구. 그는 극동에서 진행의 결과에 대해 매우 상심하고 있었고, 그의 외교관 생활이 끝날 것이라고 두려워하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 30세로 죽은 그가 이룩한 성과는, 당시 거의 망해가는 나라의 외교관이 할 수 있던 성과 치고는 준수한 것이어서, 이 때 죽지 않고 계속 외국에 남아 독립운동에 기여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국내에서는 그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추도회가 거행되었다. 또한 고종은 그의 유해를 고국으로 이송한 뒤 서울 장충단에 배향하고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덕성리 금현에 예장하게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한응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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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성공파 도절제사공파로 31세손 '漢'자 항렬을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