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맹기(孟綺) / 만산(晩山) |
본관 | 광주 이씨[1] |
출생 | 1868년 4월 26일 |
경상도
칠곡도호부 상지면 심천리 (현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심천리)[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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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5년 3월 12일[3] (향년 66세) |
경상북도 칠곡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323호 |
상훈 | 건국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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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0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이이익은 1868년 4월 26일 경상도 칠곡도호부 상지면 심천리(현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심천리)에서 아버지 이태운(李泰運)과 어머니 인동 장씨[4]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919년 3월 민족대표 33인에 유림 인사가 한 명도 없음을 통탄해하던 곽종석 등은 영남유림 및 김복한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유림 총 137명을 설득, 대표로 하여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고자 하였다.
이이익은 이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들은 '파리장서'를 통해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 고종황제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1919년 4월 12일 경상북도 성주군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당시 독립청원서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이 때문에 이이익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다만,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하지 않았다.
이후 1935년 3월 12일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사망했다.
201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10년 11월 2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