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1-30 18:48:43

이영방

李永芳
(? ~ 1634)

1. 개요2. 행적

1. 개요

명나라, 청나라의 장수. 전변략기의 요이략에 따르면 이성량의 아들이자 이여송의 동생인 이여백의 아들이라고 한다.

2. 행적

요동 철령 사람으로 명나라에서 무순천호소의 비어관을 지내다가 유격에 올랐으며, 1618년 4월 15일에 후금의 공격으로 무순성이 포위되고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가 투항 권유 서신을 보내자 거짓으로 항복한다고 해놓고 싸울 준비를 했지만 후금의 군사가 성을 공격해 함락되자 항복했다.

투항하면서 3등 부장이 되었고 항복한 후금의 관리들에 대한 통솔권을 받았고 누르하치의 일곱번째 아들인 아바타이 타이지의 딸과 혼인해 부마인 푸시 어푸가 되었으며,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하면서 이를 수행해 3등 총병관이 되었다. 1619년에 사르후 전투에 참전해 병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1621년 2월 22일에는 아부투 바투루와 함께 후금에 투항한 명 관리들의 명의로 글을 만들어 명나라에 보냈으며, 7월에 모문룡이 진양책을 시켜 진강을 점령한 후에 후금으로 투항한 한인들을 죽이고 조선으로 들어가자 9월에 이영방은 1만의 병력으로 봉황성에 진을 쳤다. 1625년 5월에 후금이 삼차하 동쪽의 요동 전역으로 세력을 넓히면서 요동 각지에 사신을 파견해 한족에게 변발을 강요했다가 진강 지역의 한족이 변발을 거부하고 후금의 사신을 죽였으므로, 우르궈다이와 함께 누르하치의 명으로 이들을 진압했다.

1627년에는 아이신기오로 아민을 따라 조선 공격에 나서서 정묘호란에 종군했고 인조가 화친을 청하자 아민이 체결했다가 한양으로 진격하려고 하자 이를 말렸다가 아민으로부터 한족 노예놈이라는 멸칭을 들었다. 이후 1634년에 사망했다.

아들은 9명이 있었고 딸은 아바타이의 손자인 보국공 우옹구에게 시집갔다. 건륭제 때 총독인 이시요가 그의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