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고지(395고지)는 강원도 철원 서북방 12km 지점 고암산과 효성산이 교차해 남쪽으로 흐르는 능선의 끝자락에 위치한 야산으로 ‘철의 삼각지(철원, 김화, 평강)’ 중에서도 철원평야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략지 요충지이자 물자 보급로로서 국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형이었다.
1952년 10월 6일, 첫 전투가 개시되고 395고지를 지키던 제30연대는 다음날까지 중공군의 공격을 4차례나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같은 시각, 이성덕 중위는 395고지 북쪽에 있는 전초진지인 ‘화랑고지’를 지키고 있었다. 화랑고지는 중공군이 395고지로 남하하려면 반드시 건너야 하는 역곡천 지류가 내려다 보이는 요충지였다. 중공군은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집중시켰으나 이성덕 중위가 속한 11중대는 중공군의 거듭된 공격을 격퇴하여 화랑고지를 사수했다.
중공군은 후퇴하던 일부병력을 화랑고지 공격에 증원하여 1952년 10월 7일부터 재차 공격에 나섰다. 탄약과 식수조차 부족한 상황에서 고지를 사수하던 제11중대는 포위되었고 이성덕 중위는 소대원들을 독려하며 적의 공격을 막던 중 머리에 포탄 파편을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후로도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면서 한때 화랑고지를 포함해 395고지를 적에게 내주기도 했으나, 10월 15일 제28연대가 395고지를 되찾는데 성공했다. 이어서 제29연대가 화랑고지 선상의 전초진지를 확보하면서 결국 백마고지 전투에서 승리했다. 백마고지 전투는 395고지를 놓고 열흘 동안 12번에 걸친 공방전이 벌어지고 주인이 7번이나 바뀔 만큼 한국전쟁에서도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였다. 중공군은 약 5만 5천발, 국군은 약 22만발 등 총 27만 5천발의 포탄을 사용하였고 유엔군은 754회의 출격횟수를 기록하였다. 전투 후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없이 돌가루와 흙더미만 남아있는 395고지의 모습이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활약한 그의 공적을 기려 중위으로 1계급 특진과 을지무공훈장(1952년), 화랑무공훈장(1954년)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