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04 08:02:01

이석(1881)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성명 이석(李錫)
생몰 1881년 2월 15일 ~ 1909년 2월 14일
(향년 27세)
출생지 경상도 청송도호부
(현 경상북도 청송군)
본관 경주 이씨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생애2. 사후

1. 생애

이석은 1881년 2월 15일 경상도 청송도호부(현 경상북도 청송군)에서 태어났다.

1896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각지에서 민중들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또한 15세의 어린 나이로 총을 메고 의병에 참가했으나 의병진이 해산되자 산으로 들어갔다.

그 후 1905년 겨울, 이한구 등이 경주의 동대산(東大山)에서 의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고는, 동지를 이끌고 그 의병진에 가담하여 당초 초장(哨長)의 직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고군분투한 공이 인정되어 좌영장(左領將)에 발탁되었다.

1907년에는 남석문(南錫文)·정순기(鄭純基) 등과 더불어 청송· 영덕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던 중 남석문은 체포당하여 처형되었고 이석은 중도에 되돌아와 화를 면했다.

또한 같은 해 정용기 의병대장이 입암(立岩)에서 전사하니 그의 부친 정환직이 뒤를 이어 의병을 통솔하게 되자, 그는 중군(中軍)이 되어 분전하였다.

그러던 중 정환직 대장마저 청하 지방에서 체포당해 처형되자 의병진은 그 주장(主將)을 모두 잃게 되었다. 이때 그는 자신의 나이가 아직 어린 것을 이유로 주장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또다른 주장(主將)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 후 장기로 진격, 그곳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20여 명을 사살하였으며, 청하에서는 적 4명을 격살(擊殺)한 뒤 의병을 이끌고 울산을 향해 진군하던 중 매복 중이던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크게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한 뒤 훗날 다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기약, 의병진을 해산시키고 고향으로 내려가 삼유산(三踰山)아래 도평촌(道坪村)[1]에 은거하고 있던 중 1909년 2월에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그는 이후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탈옥에 성공, 도주하였으나 다시 체포당해 같은 달 14일 순국하였다.

2. 사후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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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도평리로 추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