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출생 | 1914년 9월 8일 |
전라남도 나주군 다시면 복암리 | |
사망 | 2010년 4월 12일 (향년 95세) |
전라남도 나주시 남외동 남외2길 4번지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학력 |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
상훈 | 건국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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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6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이광춘은 1914년 9월 8일 전라남도 나주군 다시면 복암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정미소를 운영하는 부친의 극진한 사랑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활달하고 진취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뒤 동교생들과 함께 소녀회를 조직하고 소녀회의 핵심 멤버로서 활동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그러던 1929년 10월 30일, 당시 광주여고보 3학년이던 이광춘은 친구 박기옥과 함께 통학 열차에 탑승하여 이동하다가 나주역에서 출입구를 나가려 했다. 그때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교의 4학년 학생 후쿠다 슈조(福田修三)·스메요시 가쓰오(末吉克己)·다나카(田中) 등이 접근해오더니 이광춘과 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했다.
이때 역에서 같이 걸어나오고 있던 박기옥의 사촌 남동생이자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생 박준채가 격분하여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자 후쿠다 슈조(福田修三) 학생이 "뭐냐. 센징 주제에."라며 무시했고, 격분한 박준채는 그의 따귀를 갈겼다. 이로 인해 나주역 내에서 한국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간의 패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교육 당국이 한국인 학생들에게만 징계를 주는 등 부당한 처분을 하자, 이에 격분한 한국인 학생들은 1929년 11월 3일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를 벌였다. 이때 이광춘은 치마에 돌멩이를 싸들고 시위에 가담했다. 그러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가혹한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후 방학이 끝나고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광주학생들의 시위는 다시 추진되었다. 이무렵 광주학생의 시위 소식은 전국으로 퍼져 전국 각처에서 학생시위가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광춘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를 중심으로 다시 학생시위의 계획을 준비했다. 1930년 1월 13일 시험시간 중, 그녀는 돌연 교단으로 뛰어 올라가 동교생들에게 시험을 거부하고 백지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급우들이 선뜻 나서지 못하고 눈치를 보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어저께 헌 약속 어떻게 된 거냐? 친구들은 감옥에 있는디 우리만 시험을 볼 것이냐."
그 직후 시험지를 놔두고 교실을 뛰쳐나오자, 이에 동조한 친구들이 삽시간에 뛰쳐나오고 전교생이 이에 동조해 시험을 집단 거부했다. 이 일로 이광춘은 체포되어 1월 15일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고 일본 경찰에 다시 붙잡혀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이후 그녀는 학교에 더이상 다니지 않고 평범한 주부로서 살아가면서 5남 3녀를 낳았고, 1954년 전남여자고등학교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199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수여받았고, 2010년 4월 12일 나주시 남외동 남외2길 4번지에서 사망했다. 향년 96세. 그녀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3. 여담
국가보훈처는 이광춘과 친구 박기옥이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하면서, 왼쪽의 학생이 박기옥, 오른쪽이 이광춘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박기옥의 외손자 박훈 씨는 전화를 걸어 "사진 속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에 계신 분이 저희 할머님"이라면서, "설명이 잘못된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에 KBS 취재진이 조사한 결과, 왼쪽의 인물이 이광춘이고 오른쪽의 인물이 박기옥인 것이 확인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