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4:36:09

의군부

義軍府

1. 1912년 조직된 의군부2. 1919년 조직된 의군부3. 1922년 조직된 의군부

1. 1912년 조직된 의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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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19년 조직된 의군부

1919년에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 단체로, 이범윤, 진학신 등이 조직하였다. 의군부는 결성 이후 북로군정서와 연계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으며 1920년에는 북로군정서와 함께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에 큰 피해를 주었다.

하지만 청산리 전투 이후 간도 참변으로 일제의 독립군 감시가 강화되자, 의군부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밀산으로 이동하여 대한독립군단 통합에 참여하였으나 1921년에 자유시 참변으로 대한독립군단이 와해되어 의군부의 무장투쟁은 위축되었다.

1922년 겨울, 영안현에 군영을 두었으나 쏘련의 지시를 받은 솔밭관 한족공산당 지피거우지부원들의 지속적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군대를 해산했다.

3. 1922년 조직된 의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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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에 조직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는 기존의 통군부 결성에 참여하지 않았던 조직들을 망라하여 대한통의부로 통합개편되었으나, 대한통의부 내부에서 복벽파와 공화파가 서로 대립하였다. 복벽파와 공화파의 갈등이 첨예해지는 가운데, 결국 전덕원의 복벽파가 대한통의부를 탈퇴하여 의군부를 조직하였다.

의군부는 복벽을 주장하는 유생들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순종의 연호였던 융희(隆熙) 연호를 습용하였으며, 의병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국내 진공을 계획하며 한때 통의부를 위협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미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복벽주의는 힘을 잃었고 공화주의와 사회주의가 대세를 이루었기 때문에 의군부는 통의부에 비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의군부는 1924년에 참의부 신민부로 흡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