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윤주일 (Yoon Ju-Il) |
생년월일 | 1980년 3월 10일 |
국적 | 대한민국 |
포지션 | 윙어, 풀백 |
신체조건 | 176cm / 70kg |
소속팀 |
대구 FC (2003~2006) 인천 유나이티드 (2007) 전남 드래곤즈 (2007~2009) 부산 아이파크 (2010) 수원시청 축구단 (2011~2012) |
국가대표 | 0경기 |
1. 개요
트레이드 한 번으로 꼬리표가 달린 비운의 선수대한민국의 전 축구선수로, 현역 시절 포지션은 윙어였다. 간혹 윙백이나 풀백 자리에서 뛰기도 했다. 국내 팬들에게는 이근호와 트레이드되었던 선수로 주로 알려진 이름.
2. 경력
2.1. 대구 FC
동아대학교 재학 당시까지만 해도 윤주일이라는 이름은 대중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동아대 졸업을 앞둔 윤주일은 때마침 새로 창단된 대구가 입단 테스트를 진행하게 되자 이에 지원했고, 합격하여 프로에 입성했다. 그리고 프로 첫 해부터 놀라운 활약을 펼치는 데 성공, 순식간에 이름을 알렸다. 윤주일은 당시 대구의 팀 내 최다 득점자이자 최대 어시스트 기록을 달성하며 주전 윙어로 발돋움하였다. 당해 신인왕 수상은 정조국에게 돌아갔지만, 윤주일의 눈부신 활약은 대구 팬들에게 잊혀지지 않았다. 당시 대구의 7승 가운데 4승은 윤주일이 공격 포인트 작성에 성공한 경기였으니, 그의 기여도를 알 수 있다.
그 이후로도 대구의 주전 측면 자원으로 기용됐지만, 아쉽게도 데뷔 시즌만큼의 임팩트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래도 2004 시즌, 2005 시즌까지 모두 주전으로 소화하며 대구의 주요 선수로 꼽혔다. 그러다가 대구에는 변병주 감독이 부임했고, 변병주 감독은 당시까지 나름 이름은 알려졌지만 프로에서는 큰 활약을 펼치지 못하던 인천의 한 유망주에 관심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선수도 인천에 이적을 요청했고, 인천 구단 측에서는 윤주일의 영입을 원했다. 그 결과 트레이드가 성사되면서 인천으로 이적하게 되는데...
2.2. 인천 유나이티드로의 트레이드
그 유망주는 바로 미래의 국가대표 주축 공격수 이근호였다. 트레이드 당시까지만 해도 인천이 이득을 봤다는 평이 지배적이었으나, 이근호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대활약으로 인기 스타가 된 반면, 윤주일은 아쉬움만을 남겼다.최효진의 자리를 메우리라 기대받으며 온 선수이지만, 윤주일은 인천 시절 부상에 시달리면서 많은 경기를 소화하지 못했고 간혹 나온 경기에서도 상황을 반전시킬만한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인천 팬들은 인천 지역 출신, 그것도 부평고등학교 출신의 유망주를 내주면서 데려온 윤주일에게 기대를 많이 했었고 그만큼 이 상황에 대한 비판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반 시즌만에 송유걸과 트레이드되면서 전남 드래곤즈로 이적할 수밖에 없었다.
2.3. 이후의 경력
전남 이적 후에도 몸이 안 올라온 윤주일은 폼을 서서히 끌어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서서히 개선되는 가 싶었지만... 뜬금없이 병역 비리 스캔들에 휘말리고 만다. 비슷하게 걸린 정종관[1]은 유죄가 확정됐으나, 윤주일은 무죄가 입증되어 간신히 프로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보낸 세월로 인해 폼은 한없이 추락했고, 이후 부산 아이파크 이적 후에도 부상에 발목을 잡히며 무너졌다. 결국 2011년 내셔널리그의 수원시청 축구단으로 이적했고, 주축 측면 자원으로 다시 올라서서 좋은 모습을 보였다. 2012 시즌 종료 후 수원시청은 수원 FC라는 이름으로 프로에 입성했지만, 윤주일은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고, 결국 그는 프로에 돌아오지 않은 채 자신의 커리어를 마감했다.3. 플레이 스타일
측면 수비까지 가능할 정도로 활동량이 많고, 개인 기량도 준수했던 선수. 잦은 부상으로 인한 페이스 저하가 안타까운 선수였다.
[1]
이후 승부조작 브로커 활동까지 한 인물로, 수사 확대 이전에 스스로 자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