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3f51ba><colcolor=#fff> 劉景素 유경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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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건평왕(建平王) |
성 | 유(劉) |
이름 | 경소(景素) |
부모 |
부친 선간왕(宣簡王)
유굉(劉宏) 모친 주씨(周氏)[1] |
생몰 | 425년 ~ 476년 |
재위 | 유송의 건평왕 |
458년 ~ 47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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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북조시대 유송의 황족으로 건평선간왕(建平宣簡王) 유굉(劉宏)의 아들이다.2. 생애
문제 유의륭의 7남인 건평왕(建平王) 유굉(劉宏)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경소는 젊은 시절에 문학을 좋아했고 아버지 유굉의 풍격이 있었으며, 유굉이 458년 사망하면서 봉작을 물려받았다.460년, 영삭장군(寧朔將軍)·남제음군(南濟陰郡) 태수로 임명되고 역양남초2군(歷陽南譙二郡) 태수로 옮겼으며,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임명되기도 했으나 중서시랑은 받지 않았다. 뒤에 감남예예2주제군사(監南豫豫二州諸軍事)·보국장군(輔國將軍)·남예주 자사로 제수되었으나 이 또한 받지 않았다.
명제가 즉위한 뒤,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가 되고 보병교위(步兵校尉)를 겸임하였으며, 뒤에 태자좌위솔(太子左衛率)이 되고 급사중(給事中)이 더해졌다. 관군장군(冠軍將軍)·남연주(南兗州) 자사가 되었고 단양윤(丹陽尹), 오흥군(吳興郡) 태수, 사지절(使持節)·감상주제군사(監湘州諸軍事)·상주 자사를 역임했다.
470년, 도독형상옹익량녕남북진8주제군사(都督荊湘雍益梁寧南北秦八州諸軍事)·좌장군(左將軍)·형주 자사가 되었다. 472년, 명제의 태자인 유욱이 즉위했다. 유경소는 이때 산기상시(散騎常侍)·후장군(後將軍)·태상(太常)이 되었으나 받지 않았고, 대신 사지절·도독남서남연연서청기6주제군사(都督南徐南兗兗徐青冀六州諸軍事)·진군장군(鎭軍將軍)·남서주 자사로 제수되었다. 473년, 진북장군(鎭北將軍)이 되었다.
474년, 계양왕(桂陽王) 유휴범이 반란을 일으켰다. 유휴범의 반란은 얼마 못가 종식되었으나, 이때 유경소는 심유지(沈攸之)·유섭(劉燮)·왕승건(王僧虔)·장흥세(張興世)와 함께 근왕병을 일으켰으며, 근왕병을 일으킨 공으로 정북장군(征北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으나 다만 이때 소도성이 남연주 자사로 부임하면서 유경소는 도독에서 해임되었다. 당시 문제의 아들들은 이미 모두 죽었고 문제의 손자들 중에서는 유경소가 가장 장성했고 명망도 높았다. 또한 유경소는 문학을 좋아했고 선비들을 예우했기에 안팎에서는 어린 나이임에도 성품이 잔혹한 유욱을 대신하여 유경소가 제위에 오르기를 바라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었다. 유경소의 명성을 달가워하지 않은 이들은 유욱의 외척인 진씨(陳氏) 일족, 그리고 유욱의 측근인 양운장(楊運長)과 완전부(阮佃夫)였다.
475년, 유경소의 수하인 방합장군(防閤將軍) 왕계부(王季符)가 유경소에게 미움을 사 원한을 품고 건강으로 달아나 양운장과 완전부에게 "유경소가 배반하려고 한다"고 알렸다. 양운장과 완전부는 유경소를 토벌하려고 했으나, 소도성과 원찬 등 신하들이 강하게 반대했고, 유경소 또한 왕계부가 달아난 사실을 알고 재빨리 아들 유연령(劉延齡)을 조정으로 보내 해명했다. 결국 왕계부는 양주(梁州)로 유배되었고, 유경소는 진북장군·개부의동삼사에서 파면되었다.
유욱의 패악이 점점 심해지고 조정의 명망은 점점 유경소에게 모여드는 가운데, 유경소는 하계목(何季穆), 은니(殷濔), 채이(蔡履), 원경연(垣慶延), 하문초(賀文超)와 밤낮으로 공모했고 심옹(沈顒), 관구문자(毌丘文子), 좌훤(左暄), 왕담(王潭) 등을 측근으로 삼았다. 하계목은 사촌동생 하예지(何豫之)를 참군으로 천거했고, 하예지, 왕담, 하문초 등은 금과 비단으로 여러 장수들을 끌어들였다. 이에 관군장군 황회(黃回), 유격장군(游擊將軍) 고도경(高道慶), 보국장군 조흔지(曹欣之), 전장군(前軍) 한도청(韓道淸), 장수교위(長水校尉) 곽란지(郭蘭之), 우림감(羽林監) 원지조(垣祗祖)가 모두 유경소에게 가담했고 그 밖에 뜻을 이루지 못한 많은 무인들이 유경소에게 모여들었다.
이후 유욱이 혼자 교외를 누빌 때, 조흔지는 몰래 석두성을 점령하려고 했고 한도청과 곽란지는 소도성을 불러 같이 거병할 것을 제안하고 만약 소도성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소도성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유경소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한편 양운장이 주천사(周天賜)를 유경소가 있는 곳에 잠입시키고 유경소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했으나, 유경소는 주천사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를 참수한 뒤 사마 손겸(孫謙)을 주천사의 목과 함께 조정으로 보냈다.
476년, 원지조가 유경소에게 달아나 건강에 이미 큰 난리가 났으니 거병해서 수도로 입성하라고 촉구했다. 유경소는 원지조의 말을 믿고 곧바로 거병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이미 유경소의 반란을 대비하고 있었고 원지조가 달아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방비를 굳히기 시작했다. 소도성이 현무호(玄武湖)에 주둔했고 관군장군 임농부(任農夫), 황회, 좌군장군(左軍將軍) 이안민(李安民)이 각각 보병을 거느렸고 우군장군(右軍將軍) 장보(張保)가 수군을 거느려 출병했다. 또한 관군장군·남예주 자사 단불영(段佛榮)이 도통을 맡았고 관군장군 소색이 동부성(東府城)에 주둔했다. 소도성은 황회가 유경소에게 내응할 것을 알고 이에 대비하고자 이안민과 단불영을 황회와 함께 행동하게 했다.
유경소는 이때 죽리(竹里)를 점령하고 육로를 차단하여 관군을 막으려고 했으나, 원경연, 원지조, 심옹 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날씨는 가물 때의 더위로 관군이 멀리서 와서 피로하니, 그들을 오게 한 뒤
쉬다가 피로에 지친 적과 싸우면 한번 싸워서 이길 수 있습니다.
결국 유경소는 원경연 등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은니의 분투에도 진군하지 않았다. 하지만 관군이 이미 도착해서 마을에 불을 놓았기에 원경연 등은 결국 전의를 상실했다. 게다가 유경소는 군략이 부족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유경소의 측근 수십 명이 서저(西渚)에 정박 중인 장보의 수군을 습격하여 장보를 죽이는 성과를 세우기도 했으나 따르는 이들이 없어서 결국 관군에게 다시 격파되었다. 관군의 공세가 점점 거세지는 가운데, 결국 심옹의 도주를 시작으로 원지조를 비롯한 다른 장수들도 달아났는데 좌훤만은 부대를 이끌고 만세루(萬歲樓) 아래에서 관군을 막았지만 병력이 약해서 궤멸했다. 성이 함락된 뒤, 유경소는 좌위전중장군(右衛殿中將軍) 장예노(張倪奴)와 전군장군(前軍將軍) 주반룡(周盤龍)에게 붙잡혀 참수되었다.
유경소의 반란이 평정된 뒤, 반란에 가담했던 원경연, 원지조, 좌훤, 하문초는 처형되었고 은니, 채이는 양주로 유배되었다. 하계목은 다른 곳으로 전출되어 피해를 입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쳤다가 사면이 내려와 면죄를 받을 수 있었다. 황회와 고도경은 조정의 추궁을 받지 않았고 조흔지는 곽란지와 한도청의 밀모를 고발하여 곽란지와 한도청은 처형되었다. 유경소의 아들 3명도 모두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