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0 13:12:44

위영공

위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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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衛)나라 31대 국군
영공
靈公
희(姬)
위(衛)
원(元)
아버지 위양공(衛襄公) 희악(姬惡)
아내 남자(南子)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540년 ~ 기원전 493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534년 ~ 기원전 493년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위(衛)나라의 제31대 군주. 위양공의 아들. 위출공의 할아버지. 위후장공의 아버지. 공자(孔子)에게 악평을 들을 정도로 암군이다.

2. 생애

위 양공 9년(기원전 535년), 아버지 위 양공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서 위나라의 군주가 되었다.[1]

위 영공 원년(기원전 534년), 그는 7살의 나이로 즉위식을 거행했다.

위 영공 4년(기원전 530년), 위 영공이 진경공(晉頃公)의 즉위를 축하했다. 그런데 작위가 후작으로 같기 때문에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2]

위 영공 5년(기원전 529년) 진(晉)나라, 노나라, 송(宋)나라, 정나라 등과 평구에서 회맹했다.

위 영공 12년(기원전 522년), 제표(齊豹), 북궁희(北宮喜), 저사포(褚師圃), 공자 조(公子 朝)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위 영공의 형 집을 죽이고 위 영공은 피난했다.

위 영공 13년(기원전 521년), 위 영공이 돌아오니 공자 조는 송나라에 구원을 요청해 무리들을 안심시켰다.

위 영공 17년~위 영공 19년(기원전 517년 ~ 기원전 515년), 2차례 북궁희는 제후들과 회맹했다. 이때 반란이 평정되었다.

위 영공 30년(기원전 504년), 진(晉)나라, 노나라, 송나라, 채나라의 제후들과 회맹했다. 위 영공이 사람을 보내 주왕의 신하인 강홍에게 축하 의사를 보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권력을 안정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위 영공 32년(기원전 502년), 양호(陽虎)가 진(晉)나라를 치면서 길을 위나라에 빌려 달라하니아직 명목이 있는 강대국인 진(晉)나라를 노나라의 힘으로 치려하다니 무슨 배짱일까? 위영공이 크게 노해 미자하를 보내 습격하게 했다. 공숙 문자가 간하니 위 영공은 미자하를 불러들였다.

위 영공 33년(기원전 501년), 사람을 보내 제경공(齊景公)과 짜고, 위나라의 행인 북궁결 등의 북궁씨(北宮氏) 세력을 약하게 했다.

위 영공 34년(기원전 500년), 진(晉)나라와 사타에서 회맹했는데, 그 내용이 굴욕적이었는지라 성하의 욕이라고 했다.

위 영공 35년(기원전 499년), 위 영공이 중모(中牟)를 쳤다.

위 영공 36년(기원전 498년), 진(晉)나라가 위나라의 수도를 포위했다. 위 영공은 굳게 지키면서 나가 싸우지 않았다. 진군이 물러나자 위나라는 사타에서 강화를 했다.

위 영공 40년(기원전 494년), 위 영공은 공숙 술, 조양, 북궁결, 태자 괴외(太子 蒯聵), 공맹 구(公孟彄) 등을 몰아냈다.

위 영공 41년(기원전 493년), 위 영공이 죽었다. 공자 영(公子 郢)이 끝내 거절하자 결국 남자(南子)는 괴외의 아들인 첩(輒)을 세우니 그가 바로 위 출공이다.

3. 여담

공자와 동시대 사람이라 그런지 위나라 군주들 가운데서는 남아있는 일화가 많은 편. 공자에게 진법(陣法)[3]을 물었다가 까인 적[4]도 있고, 좀 후대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한비자에 수록된 망국지음이나 여도지죄 등에도 주연으로 등장한다. 문서를 확인하면 알겠지만 전부 까이는 역할이다.

부인 남자는 송나라 공주 출신으로, 유명한 색녀였으며, 공자와 만나기도 했다. 음란하다는 평가와는 조금 상반되게 공자를 존경한 걸로 보이는데 공자가 위나라를 방문했을 때 억지를 좀 부려 공자와 면담한 것이다. 공자의 제자 자로가 이를 힐난하자 공자는 하늘에 맹세까지 하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1] 출생의 비밀에 대해서는 위양공 문서 참조. [2] 춘추에서 위 영공이 최초로 까이는 기록이다. [3] 전쟁터에서 진치는 법. [4] 심지어 논어에서는 이 일화가 한 챕터의 서두에 위치하기 때문에, 챕터의 첫 문장에서 챕터 이름을 따오는 전통에 따라 논어의 15번째 챕터 이름은 위영공편이다. 챕터 내내 위영공이 등장하는건 서두의 그 한 장면 밖에 없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