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1-17 21:07:52

위구태(왕자)

尉仇台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차이점

1. 개요

부여의 왕자. 위구태왕과의 관계는 불분명하다.

이름의 뜻이 구태 2세인데 이에 대해 이름이 그냥 구태(仇台)라는 설과 우태의 직계 후계라는 설이 있다. AD 120년 후한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선물로 인수(印綬)와 금색 비단을 받았다고 한다.

AD 121년과 AD 122년에는 고구려가 현도군을 공격하자 2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군을 지원해 5백명을 참수하는 공을 세웠다. 그리고 AD 136년에 부여왕이 한나라를 방문한 바 있는데, 이 때 그 부여왕이 정황상 위구태일 가능성이 있다.

'136년에 부여왕이 한나라를 방문한 바 있는데[1], 이 때 그 부여왕이 정황상 위구태일 가능성이 있다.'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 정확한 건아니다. 앞서 말했듯 "그 왕"으로 지칭되고 바로 앞에서 위구태를 언급하기는 했으나 "그"가 "부여국"을 지칭하거나 위구태를 보낸 시왕을 뜻할 수도 있기 때문.

2. 차이점

위구태 위구태왕 사이에는 약 70년 정도 되는 시간차가 존재한다. 게다가 167년에 현도군을 공격한 부여왕 부태(夫台)가 확인되기 때문에 두 위구태는 서로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적지 않은 역사책에서 두 인물을 섞어서 기록했다. 위구태왕이 죽은 뒤 간위거왕이 즉위했는데, 이 인물이 위구태의 아들인지 위구태왕의 아들인지는 불명확하다. 보통은 위구태왕의 아들이라고 여긴다.

경향신문의 1987년 9월 11일자 기사에서 위만의 손자인 우거의 명칭이 고유 명사가 아닌 우두머리를 지창한다는 조승복 교수의 주장에서 언급되고 우거가 고유 명사라 한 안사고의 주장은 잘못되었으며, 우거에 대한 음운변이를 고구려의 우거, 부여왕 간위거, 위구태 등을 언급하면서 씨족의 생활 공동체를 다스리는 우두머리 또는 우두머리 직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라 했다.


[1] 順帝永和元年,王來朝京師,帝作黃門鼓吹,角抵戲以遣之.桓帝延熹四年,遣使朝賀貢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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