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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蔚山 太和寺址 十二支像 舍利塔.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동에 있는 태화사 터에서 출토된 9세기 경 통일신라시대의 석조 사리탑.[1] 현재 울산박물관에 소장되었고 보물 제441호로 지정되었다.2. 내용
사리탑: 높이 1.34 m, 밑지름 0.9 m.
대석: 파손되지 않은 부분 길이 179 cm, 파손된 부분 125~97 cm.
십이지상 : 크기 46~48 cm, 간격 13~15 cm.
1962년 5월 11일 울산시 중구 태화동에서 발견된 남북국시대 신라 석조 사리탑으로, 한반도 석종형 부도 중에 가장 오래된 유물일 뿐만 아니라 표면에 십이지상을 조각한 것으로도 유일한 고대 사리탑이다. 크기나 모습은 조선 시대의 석종형 부도와 비슷하지만 부도 상부에 감실이 파여 있는 점이 특이하다. 9세기 통일신라에서 제작했다.
태화사(太和寺)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중국에서 가져온 사리를 모시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자장율사가 부처의 머리뼈와 어금니, 사리 100알과 부처가 입던 붉은 깁에 금점이 있는 가사 한 벌을 가지고 온 후 사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한 부분은 황룡사 탑에 두고 한 부분은 태화사 탑에 두고 한 부분은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두었다."라고 하므로,당시 울산 태화사가 황룡사나 통도사와 견주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대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경내의 '태화루'라는 누각은 울산 제일의 명승지로 꼽힐 정도로 절경이었다고 하나, 조선 시대에 들어와 모든 절이 파괴되어 누각만 나았고, 곧이어 터진 임진왜란으로 누각마저 불에 탄 후 더 이상 복구되지 못했다.
이 탑은 1962년 5월 11일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동 반탕골 산비탈에 매몰된 모습을 보고 마을 주민이 신고하여 발굴된 것이다. 발견 직후 경남도청이 있었던 부산으로 옮겨 관리되다가 도청이 창원으로 옮겨감에 따라 울산 학성공원 내에 보관되었고, 이후 2011년 울산박물관의 개관에 맞춰 울산박물관로 이동, 관리하게 되었다.
이 석조 부도는 석종형이지만 보주가 얹어진 석종형보다는 마치 복숭아 연적과 무릎연적을 연상케 하는 독특한 곡선을 그린다. 독특한 것은 형태뿐만이 아니다. 사리장치를 두었으리라 추정하는 부도 남면의 감실형 사리공이나 감실 아래쪽으로 부도를 감돌며 조각된 십이지상도 개성적이다. 사리공은 대좌 중앙이나 몸돌 아랫면에 마련함이 통례이므로 매우 독특하다. 십이지상도 신라시대 능이나 석탑, 석등 등에 간혹 나타나긴 하지만 부도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사례다. 신라의 능이나 석탑, 석등 등에 십이지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오직 한반도에서만 볼 수 있는 문화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12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한국의 석조 사리탑으로, 한국 고전 석조 미술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1966년 3월 3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울산 태화사지 십이지상 사리탑
- 한국어 위키백과 : 울산 태화사지 십이지상 사리탑
- 두산백과 : 태화사지 십이지상 승탑
-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 태화사터 십이지상 부도와 학성
-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 태화사지 십이지상 부도
- 향토문화전자대전 : 울산 태화사지 십이지상 사리탑
- 대한민국 구석구석 : 울산 태화사지 십이지상 사리탑
4. 보물 제441호
태화사터에 묻혀 있던 것을 1962년에 발굴하여 일시적으로 부산으로 옮겼다가, 다시 울산의 학성공원으로 옮겨와 보존하고 있었다. 2011년 현재는 울산박물관으로 이전하여 보존하고 있다.
태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던 시기에 없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남아있는 유물로는 이 사리탑이 유일하다.
일반적인 사리탑들과는 달리 널따란 바닥돌 위에 종 모양의 몸돌이 놓인 간단한 구조로, 바닥돌에는 앞면과 옆면에 가느다란 안상(眼象)이 움푹하게 새겨져 있다. 종 모양을 하고 있는 몸돌은 윗부분에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 입구를 만들고, 그 안쪽으로 깊숙이 파놓아 사리를 모셔 두도록 하였다. 감실 입구 아래로는 12지신상을 돌려가며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는데, 머리는 짐승이고 몸은 사람의 모습으로 거의 나체에 가깝다. 12지신은 띠를 나타내는 12동물로,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능을 보호하기 위한 의도로 조각되어 세워지기 시작하였는데, 이곳에서처럼 사리탑에 새겨지는 것은 보기 드문 예이다. 사리탑을 하나의 묘로 보아 이들을 새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종모양의 사리탑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지니며, 수법이나 조각들의 기법들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태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던 시기에 없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남아있는 유물로는 이 사리탑이 유일하다.
일반적인 사리탑들과는 달리 널따란 바닥돌 위에 종 모양의 몸돌이 놓인 간단한 구조로, 바닥돌에는 앞면과 옆면에 가느다란 안상(眼象)이 움푹하게 새겨져 있다. 종 모양을 하고 있는 몸돌은 윗부분에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 입구를 만들고, 그 안쪽으로 깊숙이 파놓아 사리를 모셔 두도록 하였다. 감실 입구 아래로는 12지신상을 돌려가며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는데, 머리는 짐승이고 몸은 사람의 모습으로 거의 나체에 가깝다. 12지신은 띠를 나타내는 12동물로,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능을 보호하기 위한 의도로 조각되어 세워지기 시작하였는데, 이곳에서처럼 사리탑에 새겨지는 것은 보기 드문 예이다. 사리탑을 하나의 묘로 보아 이들을 새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종모양의 사리탑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지니며, 수법이나 조각들의 기법들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1]
승탑(僧塔) 또는 부도(浮屠)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