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중군 방어전 雲中郡防禦戰 Defense of Yunzhong Commande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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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기원전 333년 | |
장소 |
조선 기미부주 구원(九原)-운중(雲中) 일대 (오늘날의 내몽골 자치구 후허하오터 시(呼和浩特市) 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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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 동월지협공전의 여파로 인한 흉노의 보복 시도 | |
교전국 | 흉노匈奴 | 조선朝鮮 |
지휘관 | 좌녹려왕[1]† | 비비오(=투제)[2] |
병력 | 흉노군+일부 서월지군 1만 7천여 명 | 의용병 4천 7백여 명[3] |
피해 |
6천 6백 50여 명 사상[4] 좌녹려왕 전사 |
1천 3백 50여 명 사상[5] |
결과 |
흉노의 대패 흉노 좌녹려왕 전사, 초원에서 조선의 위상 상승 비비오가 조선 조정에 주목받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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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
서초원 갈등의 씨앗 흉노의 동진 좌절 기원전 331년 흉노와 진의 석문산 전투에 영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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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 동월지협공전에 대한 보복, 그리고 진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 이전에 조선에 대한 견제를 목적으로 이루어진 흉노의 공격을 조선의 구원-운중 기미부주에서 비비오를 중심으로 한 의용병이 자체적으로 막아냈다. 이 전쟁으로 초원에서 조선의 위상이 임호 정벌과 동월지협공전에 이어서 또다시 상승하였고, 흉노의 동진 시도는 중단되었다.2. 배경
2.1. 흉노의 사정
흉노의 경우 지난 동월지협공전에서 진이 흉노의 예하 세력인 동월지 공격을 주도했다고 여겨지면서 진에 대한 복수전에 주력할 것으로 보였지만, 그런 준비 와중에도 조선 공격에 단순한 시선돌리기 목적 이상의 상당한 역량을 투입하였다. 동호와 동서초원을 양분하고 대립하느라 조선과는 '긁어 부스럼' 만드는 일을 피하려고 하던 것을 생각하면 의외였지만, 여태껏 전적을 보면 또 그렇지만도 않았다.13년 전인 기원전 346년, 흉노는 임호 및 동월지와 연합해 돈황 전투에서 서월지를 꺾고 잔여세력을 복속시키며 서초원의 패자가 되었다. 이러한 부족연합 구조에서 패권을 유지하려면 복속된 세력들에게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거나, 군사활동의 성공을 통해 위신을 드높여야 했는데, 조선의 행보는 여기에 대해 성가신 위협으로 작용해왔다. 흉노와 대립 관계인 동호를 관시 무역을 통해 물자를 공급하는 식으로 지원했으며, 기원전 343년의 임호 정벌, 기원전 335년의 동월지협공전으로 흉노 팩션에 속한 세력들을 건드리는 등 흉노 선우의 위신을 깎아내릴 만한 행동을 계속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흉노는 진 공격을 준비하는 와중에도 단순한 '약탈' 수준을 넘어서 '전쟁' 목적으로 좌녹려왕이 직접 지휘하는 1만 7천여 명의 병력을 투입, 팩션 내에서 위신을 세우고 조선 측에는 보복전을 통해 강력한 의사를 표명하고자 하였다.
2.2. 조선의 상황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조선 측은 절찬리 방심 중이었다. 조선은 흉노를 상대로 한 첩보에서 정보를 하나도 얻지 못하는 등 흉노의 정보통제가 심하단 점은 깨달았다. 하지만 동월지협공전을 주도한 측을 진으로 몰아가는 정보공작이 동월지 상대로 상당히 잘 먹혀들어갔기 때문에, 흉노가 자신들을 먼저 공격하리라고는 미처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가지 더 암울했던 점은, 그나마 빠른 대응을 기대해볼 만 했던 진북장군부와 정서장군부마저 해당 장군들이 중앙관으로 승진하며 해산되었다는 점이었다. 이에 따라 운중군(雲中郡, 구원-운중 기미부주) 일대는 사실상 무방비, 시간 맞춰 도착할 수 있을지도 의문인 대(代)의 조력 정도를 제외하면 현지 재량에 맡겨진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흉노의 1만 7천 기병은 이런 절묘한 타이밍을 찔러들어온 셈이었다. 누가 봐도 기미부주 상실 또는 초토화는 기본에, 기미부주 구원을 위해 대(代)의 병력을 일부 이동시키다 각개격파라도 당하면 조선 본령의 북변까지도 위태로워질 법한 위기였다. 그러나...
3. 전투의 전개
3.1. 운중군의 패닉, 비비오의 교통정리
1만이 훨씬 넘는 흉노의 군세가 운중군(雲中郡) 외곽을 공격 후 계속 진군 중이라는 소식에 기미부주의 유력자들은 패닉에 빠졌다. 의지할 만 한 조선군도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던 데다, 그들이 독립세력인 임호(林胡)였던 시절부터 세력차가 분명한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당장 흉노가 서초원의 패자가 된 전투인, 기원전 346년 돈황 전투에서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던 흉노가 동월지, 임호와 공투했을 때도 동월지와 임호의 세력을 전부 합쳐야 겨우 약화된 흉노와 비등한 수준이었다. 하물며 그 전투 이후 13년 동안 흉노는 서초원의 패자에 등극하고 세력을 다시금 확대, 유지해온 반면, 이들은 조선에 정복당해 기미부주가 되고 황하 너머의 잔당은 동월지로 소속을 옮겼다가 그나마도 동월지협공전 때 상당수 쓸려나갔으니 격차가 훨씬 더 커진 셈이었다. 그 병력이 전부 운중군 공격에 투입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이 파악한 흉노의 동원병력인 '최소 1만여 명 이상'[6]만 해도 운중군 전체에서 소집 가능한 병력보다 훨씬 많았으니 이들이 어쩔 줄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대책 논의에서 '우리 힘만으로 흉노를 어떻게 상대하느냐', '사절을 보내 흉노 측의 요구조건을 무조건 수락하자'와 같은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이들에게는 다행히 희망이자 구심점 역할을 해 줄 인물, 비비오[7]가 있었다. 임호 귀족 출신이었던 비비오는 전(前) 진북장군[8]이자 이 시기엔 중앙으로 영전해 대사마대장군[9]이 되었던 조옹의 오른팔로 활약하며 본인의 실력과 예하 부대원들의 정예함으로 운중군 내에서 명망을 드높였고, 경력이 경력인 만큼 조옹을 비롯해 곽구, 고질 등 이 시기 조선 군부의 핵심 인사들과도 연줄을 가지고 있는 운중군의 유력 인사였다.
흉노군이 아직 운중군(雲中郡)의 중요 지역에 진입하기 전에 상황을 알아채고 유력자들을 소집해 이를 알린 비비오는, 이들이 위와 같은 추태를 보이자 '공격 양상으로 보아 목표는 물자나 이익이 아니다, 저쪽은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던 공격을 계속할 것'이라며 결사항전 밖에 답이 없다고 설득하였다. 찬반이 팽팽하게 갈리는 상황에서 비비오는 계속해서 나머지를 설득해 중립파의 마음까지 돌려세웠고, 결국 전체의 2/3 가량인 기존 항전파와 중립파는 바로 항전에 나서고, 나머지 1/3 가량의 반대파도 무조건 항복 대신 조선 본령이자 조옹의 영지인 대(代)에 연락해 지원군을 불러오기로 하였다.
이들의 긴급 지원 요청을 받은 대(代)에서는 4,400여 명, 인근의 동호(東胡) 부족에서도 2,300여 명의 지원군을 파견하기로 한다.[10] 그러나 비비오가 항전을 위해 모은 의용병이 총 4,700여 명이었으니 다 합쳐도 11,400여명으로 흉노 측의 17,000여 명에 비해 훨씬 열세, 그것도 흉노 측은 한꺼번에 몰려드는 반면 이쪽은 비비오의 군세와 대-동호 측의 지원군으로 나뉘어 있는 암울한 상황이었다. 군사적으로만 따지면 유격전 또는 아군이 서로 합류할 때까지 적을 깊숙이 유인하는 게 상책이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이것도 무리였다. 기미부주 곳곳의 부족에서 황급히 끌어모은 의용병들로 흉노가 골라보낸 전사들을 상대로 초원에서 유격전을 시도할 수는 없었다. 유인작전 역시 합류해도 적의 머릿수가 훨씬 많을 뿐더러, 적이 초토화를 시도하는 상황에서 그랬다가는 설사 격퇴에 성공한다고 해도 기미부주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말 터였다.
결국 비비오는 주요 지역 인근에 은폐 후 기습, 적장의 목을 노리는 특공을 통해 적군을 와해시킨다는 기책(奇策)을 선택한다.
3.2. 일말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리적으로 훨씬 익숙하다는 이점을 이용, 구원(九原) 일대의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인근에 은신한 비비오군은 흉노군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주민들이 이미 도망친 것을 확인한 흉노군은 빈집털이만으로는 조선에 대한 보복과 경고가 확실히 전해지기 어렵다고 판단, 도망친 이들이 기미부주의 중심지인 운중(雲中)으로 집결했으리라 예상되는 만큼 빠르게 이들을 추격, 최대한의 인명피해를 강요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급하게 동진을 계속하면서 흉노군의 진형과 대열은 크게 흐트러졌고, 여기에 17,000여 명의 정예병인 자신들을 상대로 머릿수도, 정예함도 밀리는 기미부주의 어중이떠중이 구(舊) 임호인들 따위가 도망쳐서 지원군을 기다리는 일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방심도 좌녹려왕이 이를 신경쓰지 않고 빠른 이동만을 재촉하는데 한 몫을 했다.숨어 있던 비비오군은 흉노군의 군율이 이렇게 크게 흐트러진 것을 확인하고 행동에 나섰다.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도리어 적이 빠른 이동에만 지나치게 집중한 탓에, 대장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었던 점이었다. 결국 비비오는 자신의 감을 따라, 그리고 적 대장 습격에 실패할 경우 그나마 혼란을 최대화하려면 적의 뒤를 들이치는 게 낫다는 판단 하에 흉노의 후군을 기습하였고, 이는 잭팟으로 돌아왔다. 흉노 측의 총지휘관인 좌녹려왕은 실제로 후군에 위치해 있었고, 기습을 파악하고 뭔가 추스려 대처를 하기도 전에 비비오의 일격에 지휘불능 상태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얕보던 구(舊) 임호인들의 기습에 일방적으로 당한 좌녹려왕은 눈, 코, 목에 부상을 입고 너덜너덜해진 상태에서 비비오의 마무리 일격을 맞고 사망, 흉노군은 전체병력의 39%인 6,65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나머지는 도주, 흉노 영역으로 철수한다.
작중 묘사로도, 메타적 확률로도 비비오의 등장부터 좌녹려왕의 전사까지, 낮은 가능성들을 계속해 이어서 승리로 엮어낸 대전과였다.
3.3. 다소 아쉬운 마무리
대승을 거둔 비비오군이었지만, 막상 승리가 확정된 뒤에는 여러 부족들이 섞인 의용군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적 총대장이 전사한 걸 확인하자, 각 부족들이 비비오의 통제를 이탈해 전리품 수거 등 승자의 권리 행사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흉노군이 총대장을 잃고 지휘계통이 무너져 혼란에 빠졌고, 전력의 4할 가까운 큰 피해를 입었다지만 그 머릿수는 여전히 비비오군의 2배를 넘어 3배에 가까울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승패가 결정되었다며 제멋대로 굴던 이들은 후퇴하는 흉노군에 휩쓸렸고, 결국 비비오군 역시 투입한 4,700여 명의 29%, 3할에 근접한 1,350여 명의 피해를 보고 말았다. 물론 그 피해에도 여전히 교환비 1:5란 대단한 전과였지만, 의용군이 비비오의 통제를 끝까지 따랐다면 이렇게까지 피해를 보는 일은 없었을 거란 점에서 아쉬운 결과였다.이후 비비오는 흉노군이 펼쳤던 초토화 작전에 대한 보복으로 포로를 잡지 않고 죄다 죽여서 역으로 본보기를 삼았는데, 이 역시 사로잡은 포로들의 반환을 가지고 이후 협상이나 관계정상화를 시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다소 아쉬움을 낳았다. 다만 기미부주가 여태껏 시달려왔던 점, 흉노 측이 먼저 항복도 필요없다는 듯 초토화를 시도한 점, 이 승리 자체가 아슬아슬한 기적적인 승리였다는 점에서 어장(작품)의 참치(참여자)들도 몰살이란 비비오의 결정이 충분히 납득된다며 공감을 표했다.
4. 결말
조선의 대승진을 공격하기 전에 경고를 겸해 조선을 적당히(?) 주물러 주려는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던 흉노는 예상 외의 일격을 얻어맞았다. 반면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흉노에게 공격받아 운중군 일대 전체가 초토화 될 뻔 했던 조선은 구사일생으로 위기에서 빠져나왔고, 비비오가 용맹을 떨치며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조선과 흉노 양측, 나아가 초원 세력 모두에게 이런 결과는 예상 외였고, 이후의 흐름에도 여러모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5. 전후처리
5.1. 흉노의 반응
황당함당장 좌녹려왕 같은 고위직이 기습도 제대로 방비를 못 해서 죽었냐고 분통을 터뜨리던 흉노 선우부터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우리 전사들은 조선측에 피해를 입히기는 커녕 조선 정규군도 아니고 임호에 격퇴당했다는 말이군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다니.
어쨌건 좌녹려왕까지 전사하며 체면을 구긴 만큼, 재차 복수전을 시도하건 조선의 강함을 인정하고 화평하건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흉노는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멈칫했다. 복수하자니 강한 조선군을 상대로 얼마나 희생이 나올지 걱정될 뿐더러, 진을 상대로 준비하던 보복전을 미뤄야 할 뿐 아니라, 여기에 더 힘을 빼면 초원 패권의 라이벌인 동호만 좋은 일 시켜주는 게 아닌가 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렇다고 화평하자니 죽은 좌녹려왕 휘하의 부족들이나, 흉노가 대신 복수해주리라 믿었던 동월지 등에 우두머리의 위신이 서지 않을 뿐더러, 동호와 조선 사이의 유착관계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불명확한 상황인 것은 여전했다.
결국 흉노는 내부적으로 고착 상태에 빠지며 일단 조선에 대해서는 전쟁이건 외교건 상대가 먼저 접근할 때까지 관망하고, 일단 진을 상대로 한 복수전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일리 있는 판단이었지만 이는 서초원 내에서 흉노의 위신 약화를 가져왔고, 기원전 329년의 초원대전 발발에까지 부분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5.2. 조선의 대응
조선은 사실상 혼자 힘으로 전투를 매조지은 비비오를 운중태수에 임명해 운중군의 민심을 다독이는 한편, 이를 일종의 '수습기간'으로 두고 별 문제 없으면 아예 중앙으로 불러올리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흉노에 대해서는 이듬해인 기원전 332년에 사신을 보내 이번 침공을 규탄하기로 하였다.규탄 사신으로 보내진 것은 카이두(가상인물)(AA 카이즈카 이나호)란 신진 관료로, 문관이면서 비비오처럼 구 임호 출신이었기 때문에 현지 사정과 예법에 밝을 것이란 고려 하에 결정된 인선이었다. 문제는 이 인물이 조선 법가의 대부 취급 받고 법치를 강조했던 공손앙(원 역사의 상앙)의 제자 겸 학문적 후계자라 융통성이 필요한 외교 업무에는 썩 적합하지 않았다.
여기에 흉노는 '유사시 조선이 10만 대군으로 흉노와의 싸움을 지원할 것'이란 동호 측의 프로파간다가 실제 그럴 법 하다고 상당히 진지하게 염려 중이었던 반면, 조선 측은 '변경 안정을 위해 임호 정벌을 했을 뿐 이후로 자기 방위 목적 외에는 평화적(?)으로 지내 온 자신들을 동월지나 흉노가 먼저 건드렸다'고 생각하는 인식차도 한 몫 했다. 결국 흉노 선우는 '아무 잘못 없는 조선을 먼저 건드린 것은 흉노' 정도의 태도로 항의하는 카이두에게 크게 성을 내며 그를 내쫓았고, 이후로는 구원-운중 일대에 소규모 약탈을 계속 시도하는 식으로 조선을 괴롭히기로 한다.
이후 일이 상당히 성가셔지리라 예측한 조선이었지만, 서초원의 결속력 약화는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이었고, 기원전 331년의 석문산 전투, 기원전 330년의 양주 전투를 거친 뒤 기원전 329년에 초원대전이 발발하면서 서초원 세력들은 제 앞가림 하기도 바쁜 상황이 되고 만다.
[1]
흉노의 직책명. 선우, 좌현왕, 우현왕 다음 서열. 다른 이름은 좌록리왕.
[2]
유목민식 이름/조선식 이름이란 작중 설정. 다만 대체로 비비오로 통칭.
[3]
지원군으로 대군의 조선군 4천 4백여 명, 인근 거주 동호군 2천 3백여 명이 출정했지만 전투 및 뒷처리 종결 후 도착함.
[4]
총병력의 39%
[5]
총병력의 29%
[6]
실제로는 1만 7천여 명
[7]
가상인물. 메타적으로 '이 북방 조선령을 구원할 수 있는 인근 희망의 사도는...?' 판정에서 10% 확률의 크리티컬(나머지 선택지는 모두 '그런 거 없다'였다)을 뽑아서 나온 행운의 결정체. 이름이 '비비오'인 이유는 초원 계열 캐릭터의 경우 당시 언어 고증이 어려운 한계로 인해 편의상 AA캐릭터 이름을 그냥 가져다 쓰는 이 작품의 전통(...)때문에 해당 인물의 AA로 선정된 '
타카마치 비비오'에서 이름을 빌려왔기 때문이다.
[8]
임호 정벌 당시의 직책
[9]
작중 조선에서 군부 서열 1위 겸 군령계 최고위 직책.
[10]
동초원의 동호와 서초원의 흉노는 서로 대립 중이었고, 대(代) 인근에서 열리는 관시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필요성 등이 동호 측의 지원 요인으로 작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