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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몽골 자치구 영도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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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몽골 자치구 인민정부 주석 | ||
초대 | |||
우란푸 | |||
내몽골 자치구 인민위원회 주석 | |||
초대 | |||
우란푸 | |||
내몽골 자치구 혁명위원회 주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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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하이칭 | 유타이중 | 궁페이 | |
내몽골 자치구 인민정부 주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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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의 제3대 부주석 | ||
정체 | 烏蘭夫 | |
한국식 독음 | 윈쩌 | |
출생 | 1906년 12월 23일 | |
청나라 내몽골 자치구 | ||
사망 | 1988년 12월 8일 (향년 81세) |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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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중화인민항일군사정치대학교 | |
직업 | 군인, 정치가, 관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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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인.2. 생애
우란푸와 내몽골 인민회의 대표들 |
이후 그는 데므치그돈로브와 다르게 공산군을 조직해 중일전쟁에서 내몽골로 진격하는 일본군과 싸웠고, 1941년 중공의 거점인 옌안으로 가 내몽골 대표로 활동했다. 그는 1949년 중국 공산당 집권 후 네이멍구자치구 당·정·군의 실세로 자치구 주석과 당위 제1서기, 인민대표대회 주임 등을 거쳐 중앙으로 진출해 부총리, 국가부주석,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고, 소수민족 출신의 몇 안되는 국가급 지도자로서 몽고왕이라는 별명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966년,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온 중국을 휩쓸면서 마오쩌둥은 내몽골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를 더욱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덩샤오핑을 내몽골로 파견했다. 덩샤오핑은 내몽골 자치구 정부주석을 맡고 있던 우란푸를 소환한뒤 분열주의자, 지역주의자라고 맹비난을 퍼붓고 실각시켜버렸다. 우란푸는 저우언라이가 보호해 이름을 왕자력이란 한족풍으로 바꾸고 나서 은거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내몽골 인민혁명당 숙청 사건이 발생해 중국 정부에서 이미 해체된 내몽골 인민혁명당이 다시 재결성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수많은 몽골인들이 이 내몽골 인민혁명당 분자로 간주되어 잇달아 검거 투옥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이후 내몽골 자치구는 정부가 폐지되고 인민해방군의 군정이 시행되었으며 1970년에는 주변 각 성에 갈갈히 찢어져 분배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몽골어로 된 출판 행위도 금지되었다. 몽골인 학살 광풍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동북삼성, 신장 위구르 자치구, 티베트, 간쑤성 등에서 몽골인들을 닥치는대로 분열주의자, 지역주의자 누명을 씌워 체포 투옥한후 온갖 고문을 가한 끝에 살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몽골인들은 그 과정에서 혀와 코를 베이거나, 뜨거운 물을 맞거나, 이빨을 뽑히거나 목이 매달렸다. 이런 광풍은 1976년 마오쩌둥이 죽고 나서야 겨우 진정되었고, 우판푸도 1979년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