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요안니스 스킬리치스 (영어: John Skylitzes, 그리스어: Ἰωάννης Σκυλίτζης) |
출생 | 1040년경 |
사망 | 미상 |
직위 | 연대기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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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기 11세기경에 활동한 동로마 제국의 연대기 작가.2. 생애
1040년경 아나톨리아의 트라카시아 테마에서 출생했다. 당대 역사가 게오르기오스 카데노스와 요안니스 조나라스는 그를 "트라카시아의 요안니스"라고 일컬었다. 도시 이름을 호칭으로 불리지 않고 테마 전체로 지칭되는 걸 볼 때, 그는 트라카시아의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출신지를 떠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주해 법학을 공부했으며, 콘스탄티노스 10세 시기에 궁정에 발탁되어 쿠로팔라티스(kouropalates: 시위관)의 지위에 올랐다.이후 드래곤 근위연대의 일원이 되었고, 나중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수석 판사의 직위에 올랐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지사의 직위를 겸임했다. 1091년 알렉시오스 1세 황제로부터 결혼 제한에 대한 법률 해석을 요청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1094년경 법조계에서 은퇴한 뒤 연대기를 집필하여 알렉시오스 1세에게 헌정한 공으로 프로토베스타티오스(protovestirios)의 직위에 올랐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3. 시놉시스 히스토리온(Σύνοψις ἱστοριῶν)
스킬리치스는 시놉시스 히스토리온(Σύνοψις ἱστοριῶν: 역사 개요)의 저자로 알려졌다. 이 연대기의 첫번째 버전은 니키포로스 1세가 사망한 811년부터 미하일 6세가 퇴위한 1057년까지의 역사를 다뤘다. 두 번째 버전은 1078년 또는 1079년에 로코티테스(logothetes) 직책을 역임하던 니케포리치스가 사망할 때까지를 다뤘다. 그는 서문에서 지난 시대에 연대기를 집필한 미하일 프셀로스에 대해 황제들의 통치를 너무 빈약하고 편협하게 다뤘다며 비판하였고, 참회자 테오파네스 이후의 역사를 쓴 다른 10명의 역사가들도 편향적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참회자 테오파네스 이후의 연대기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정리해 후세에 널리 전하기 위해 연대기를 집필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스킬리치스 연대기는 11세기에 집필된 동로마 제국 연대기 중 가장 신뢰성이 높으며 내용도 알찬 최고의 역사서라는 호평을 받았다. 황궁에 일하면서 수많은 기록을 접할 수 있었던 그는 이를 요약 정리하면서, 지난 세기의 역사가들이 집필한 연대기도 수용하되 신빙성이 없는 내용엔 비판을 가했다. 또한 자신이 인용한 문구의 출처를 반드시 밝혔기 때문에, 현대 학자들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줬다. 그가 각 시대별로 참고한 주요 역사가들은 다음과 같다.
813~876년: 요세푸스 제네시오스[1]
876~944년: 테오도로스 다프노파티스[2]
944~971년: 프리기아의 니키포로스[3]
971~976년: ㅡ 주교 테오도로스와 조카인 세바스테르의 테오도로스가 연이어 집필한 역사 참고.
976~1025년: 세바스테르의 테오도로스의 역사 참고.
1025년~1057년: 키지쿠스의 주교 데메트리오스, 리디아의 수도사 요안니스의 기록 참고.
876~944년: 테오도로스 다프노파티스[2]
944~971년: 프리기아의 니키포로스[3]
971~976년: ㅡ 주교 테오도로스와 조카인 세바스테르의 테오도로스가 연이어 집필한 역사 참고.
976~1025년: 세바스테르의 테오도로스의 역사 참고.
1025년~1057년: 키지쿠스의 주교 데메트리오스, 리디아의 수도사 요안니스의 기록 참고.
시놉시스 히스토리온은 출간 직후부터 큰 인기를 끌었고, 수많은 필사본이 만들어졌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필사본은 '마드리드 스킬리치스(Madrid Skylitzes)'로, 12세기 시칠리아에서 제작되었고 현재 마드리드에 보관되어 있다. 이 필사본은 연대기에 574개에 달하는 풍부한 삽화를 첨부했다. 이 삽화가 동로마 제국의 양식인지, 아니면 시칠리아의 저자가 연대기를 꾸미기 위해 특별히 새로 제작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또한 삽화 밑에는 당대 그리스어 문구가 적혀 있어서, 그리스어의 변쳔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귀중한 자료로 인식되고 있다.
다만 1990년대 이후에는 그의 연대기가 콤니노스 가문의 입장을 대변하여 테오도라, 콘스탄티노스 9세 등 콤니노스 가문과 우호적이지 않았던 황제들을 부당하게 깎아내렸다며, 마냥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1]
아르메니아 출신의 동로마 역사가.
콘스탄티노스 7세의 요청에 따라 813년부터 867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했다.
[2]
'바실리오스의 삶' 및 '테오파테스 연대기'의 저자
[3]
프리기아 수도원장으로, '역사'를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