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조시대 유송의 인물에 대한 내용은 왕화(유송) 문서 참고하십시오.
王化
생몰년도 미상
서진의 인물로 자는 백원(伯遠). 왕팽의 아들, 왕진, 왕대, 왕숭의 형, 왕상의 손자.
익주 광한군 처현 사람으로 한나라의 장작대장인 왕당의 후예다.
형제는 4명이 있었고 젊었을 때 좋은 평판이 있었으며, 모시, 삼례, 춘추공양전 등을 익혔다. 군의 명으로 공조를 지내고 주에 벽소되어 종사를 지냈으며, 광록낭중, 주사, 상서랑을 지냈다.
낭중령이 되었고 정치를 깨끗이 했으며, 효렴에 뽑혔고 통일 후에는 다시 군에서 효렴에 뽑혀 낙관령을 지냈다. 현에서 가까운 변방의 요새에 있는 치호가 일으킨 반란으로 7년간 고립되었다가 경계를 푸는 틈을 타서 공격해 양식을 탈취했다.
원군이 나타나서 치호가 퇴각했고 이 공으로 관내후에 봉해졌다가 주제태수로 옮겼으며, 이민족은 풍속이 달랐지만 그들을 위로했다. 재동으로 옮겨 칭찬할만한 업적이 있었고 72세에 관직을 지내던 도중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