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도 미상
촉한의 여성이자 경애황후 장씨의 시녀, 유선(劉禪)의 후궁으로 유선(劉璿)의 어머니.
본디 유선(劉禪)의 정실 경애황후의 시녀였지만 유선의 승은을 입어 224년, 자신이 시중을 들던 경애황후보다 먼저 유선의 장남 유선(劉璿)을 낳게 되면서 정식 후궁이 되었다. 참고로 유선이 왕귀인을 임신시킨 223년은 유선의 아버지 유비가 병중 혹은 상중 일 시기라서 유선의 불효 논란이 있다. 게다가 223년은 유선의 정실 경애황후가 황후로 책봉되고 1년조차 지나지 않아 그녀의 시녀를 건드린 것이라 본처에게 충실하지 않았다는 비판거리도 있다.
경애황후가 죽을 때까지 아들을 낳지 못했는지 아니면 아들을 낳았지만 아들이 요절했는지 모르지만 결국 경애황후가 죽은 이듬해 238년, 유선(劉禪)은 왕귀인 소생의 서장자 유선(劉璿)을 태자로 삼았다. 그러나 왕귀인이 태자의 친어머니였는데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1] 차기 황후의 자리는 왕귀인이 아니라 경애황후의 여동생 장황후가 차지했다.
왕귀인의 행적은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고, 왕귀인이라는 호칭으로 미루어보아 후궁 봉작이 귀인(貴人)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당시 황후 다음가는 지위였다.
[1]
그 때 왕귀인이 이미 죽었을 수도 있고, 살아있었지만 명분에서 장황후에게 밀린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