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0 03:03:51

와세다대학/도몬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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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과 조직
정치경제학부, 이공학부 연구과,
국교학부 SILS 등 그 외 다수
입학 후 대학 생활 정보 동문 교우회 도몬카이
[稲門会]
캠퍼스 관련 상세 정보
와세다-게이오 라이벌 정기전 소케이센 [早慶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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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회 등록된 것만 1370개. 와세다대학 응원단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와세다대학 동창회를 도몬카이(稻門會)라고 부릅니다. 1885년에 탄생해 현재 (2019년 기준) 국내 동창이 63만 명이고 유학생 출신의 외국 동창생도 1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1] 동창회는 세분화돼 지역, 부(部)활동, 직업, 졸업연도, 학부, 지도교수 등등 다양해 대학에 등록된 것만 1370여 개라고 합니다. #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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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와세다대학의 도몬카이 (稲門会) (한국식으로 주로 도문회 혹은 도몬회라고도 함)에 대해서 설명한다. 도몬카이는 한국경제에 의하면, 소케이 라이벌 게이오대학 동문회인 '미타회(三田会)' 그리고 도쿄대교우회와 함께 70여만명 내외의 동문회 인맥으로 한중일에서 잘 알려져 있다. 독자적 역사가 있는 한국 교우회 등 한국 중점 정보는 와세다대학 문서를 참조.

2. 상세

  • 도몬카이의 영향력이 큰 이유는 와세다대학이 일본에서 학생수가 두 번째로 많은 대학[2]으로, 특히 문과 계열의 학생수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맘모스학교라는 별명이 있다.
  • 와세다대학 문서에서 언급되었듯 2020년대 일본 최고의 부자인 야나이 타다시 패스트리테일링( 유니클로) 사장도 와세다 출신이다. 와세다 시절 야나이 다다시는 젊은 세대를 휩쓴 히피와 록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일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일을 안하고 평생 잘 먹고 잘 살지 와세다대학에서 고민하다가 최고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 개교 2년 뒤인 1884년에 두 명의 조선인 유학생을 받아들인 것을 시작으로 여러 한국인들이 와세다대학을 거쳐갔다. 상기의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삼성 이병철 초대회장, 박태준, 롯데 신격호 회장[3], 신익희, 이광수, 송진우, 양주동, 김성수 등 많은 유명인물을 배출하였다. 그 당시 와세다대학에 한국인이 상당히 많았던 이유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제국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구제고등학교의 졸업장이 필요했는데, 당시 조선에는 구제고등학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은 조선인들은 와세다대학과 같은 사립대학에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와세다대학은 학문의 정치적 독립을 중시하는 특유의 학풍에 힘입어 다른 사립대학들과 다르게 문호를 넓게 열었고 조선인 뿐만 아니라 청나라 중화민국 그리고 현 중국의 고위급 유학생들도 학력만 뒷받침되면 내지인 차별 없이 입학이 가능했다. 반면, 제국대학은 조선인 등에 대한 차별이 심했다. 이러한 사실은 도몬카이에 대한 주요 내용과는 거리가 있으므로 와세다의 한국 및 중화권 동문 관련 자세한 내용은 와세다대학 문서 참조.
  •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학교 홍보 차원에서 열심히 밀고 있다.[4] 영화 노르웨이의 숲 사전 시사회까지 열었을 정도[5]. 2021년에는 새로 개관한 국제문학관이 '무라카미하루키 라이브러리'라는 이름으로 헌정되었는데, 평소 공개 활동을 꺼리는 무라카미가 찾아 화제가 되었다.
  • 오타쿠계의 정신적 대부인 아즈마 히로키를 처음부터 문화구상학부 정교수로 받아들인 일이나, 그 외 이런저런 행보를 보더라도 현재 이슈나 화젯거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열심히 움직이는 활동적인 학교이다.

[1] 한국인만 해도 와세다 동문이 만 명이 넘는 것으로 파악되어 모든 국적 다 합치면 2만명 정도로 추산 [2] 모든 인원을 합친 학생 수로 와세다대학은 전국 2위를 기록하고 있다. [3] 이병철을 와세다 선배로 대했다고 한다. [4] 정작 무라카미는 자신의 수필집에서 말하길 자신이 와세다대학에서 얻은 것은 지금의 아내밖에 없다고 했으며, "우리 때 와세다대학 문학부에서 뛰어난 인재라고 할 만한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 때 와세다대학 문학부는 적당히 자기가 좋아하는 과목만 공부해도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취직을 하려고 찾아갔더니 면접위원이 안됐지만 와세다대학 문학부 가지고는 안되겠네라고 해서 당황했다." 등 대학 측에서 들으면 민망할 소리만 줄줄이 늘어놓고 있다. 그래도 학교에 대한 애증은 교차하는 모양이라기보다는 그가 대학을 다녔던 1960년대의 시대적 상황(전공투 등 운동권)을 꼬집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학생운동 시기에 와세다 대학 캠퍼스 곳곳은 지하 저항서클들이 엄청나게 활발히 움직이던 때였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소설가 나카가미 켄지는 와세다대학 재학생도 아니고 와세다대학 근처 재수학원생이었는데도, 와세다대학의 지하 서클에서 학생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5] 일본 시사회를 2군데에서 했는데 한 군데가 와세다대학, 다른 한 곳은 주일 노르웨이 대사관이었다고 한다. [6] 뭐 부정입학 의혹으로 결국엔 중퇴하여 본인에게는 흑역사. [7] 진짜로 별명이 손수건 왕자(ハンカチ王子)다. [8] 닌코 덴노에 의해 세워진 학교로, 본래 황족과 화족을 위한 관립학교였다. 패전 후 사립학교로 전환되고 평민에게도 개방되었으나, 여전히 황족들은 모두 가쿠슈인에서 공부했다.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전 과정을 다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