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2-11 10:13:24

옹프루아 2세



1. 개요2. 생애3. 평가

1. 개요

토론의 험프리 2세(Humphrey II of Toron)
(1117년 ~ 1179년)
토론의 영주로, 약 27년간 예루살렘 왕국 집정관(Connétables)을 맡았다.

2. 생애

1153년, 보두앵 3세가 어머니 멜리장드와의 정쟁에서 단독으로 권력을 장악하자 이때부터 집정관(Connétables)이 되었고 이 자리는 3대의 왕[1]을 거치면서 30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1174년에는 보두앵 4세가 미성년의 나이로 즉위했는데,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가 보두앵 4세의 섭정이 되는 과정에서는 군권을 장악한 험프리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 당시 왕국의 정세와 더불어서 중요했다. 또한 초기 재위에서 군사적 경험이 아직 쌓이지 않았던 보두앵 4세가 군사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은 사람도 그였는데, 보두앵 4세가 1176년에 수행한 최초의 두 차례의 성공적인 군사 원정은 여러 신하들의 조력 중에서도 특히 험프리 2세의 경험에 의존한 것이었다.

1177년, 살라딘이 왕국에 대한 전면적인 강력한 공세를 벌인 몽기사르 전투 당시에서도 그가 중병에 걸려 있었다는 것이 십자군 전력의 약화 요인으로도 지적되기도 했다.[2]

1179년, 바니아스에서 이슬람 군을 공격하기 위해 보두앵 4세와 동행했는데, 위기에 빠졌던 보두앵 4세의 목숨을 구했지만, 그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4월 22일 사망했다. 향년 62세였다.

3. 평가

His name was byword for bravery and courage in battle. He was a kind of affliction unleased by God against the Muslims.
그의 이름은 전투에서 용맹과 담력의 대명사였다. 그는 무슬림들에 대한 신의 가호가 없는 일종의 질병이었다.
Ibn-al-Athir (이슬람 역사가)[3]

[1] 보두앵 3세 - 아모리 1세 - 보두앵 4세 [2] 다만 그는 몽기사르 전투에 참전했고 이 전투는 십자군이 승리했다. [3]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