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08년 7월 11일 영국-오스트리아-네덜란드-프로이센 연합군이 프랑스군을 상대로 벨기에의 오우데나르데에서 맞붙은 전투. 연합군이 완승을 거두었다.2. 배경
1708년 4월 초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은 네덜란드에서 사부아 공자 외젠과 만나 1708년 여름 프랑스를 향한 공세를 계획했다. 말버러 공작은 플랑드르 전선에서 공세를 이끌기로 했고, 외젠은 모젤 강 인근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을 북상시켜 말버러 공작과 상대하는 프랑스군의 측면을 찔러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기로 했다.한편, 루이 14세는 그의 군대가 블레넘 전투와 라미예 전투에서 연이어 참패한 것에 복수하고 싶어했다. 그는 플랑드르 전선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 연합군을 공격하게 했다. 당시 왕위 계승권자[1]였던 부르고뉴 공작이 명목상 최고 사령관이 되었지만, 실제로 총괄적인 지휘를 맡은 이는 방돔 공작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이었다.
1708년 5월, 프랑스군은 먼저 행동을 개시해 플랑드르의 중심부로 북진했다. 이에 말버러 공작은 급히 외젠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당장 증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후 양측은 서로 전투를 회피하며 이동했고, 프랑스군은 겐트와 브루제를 점거한 뒤 브뤼셀을 위협했다.
1708년 7월 11일, 프랑스군은 스켈드 강을 건너 오우데나르데 마을을 장악하고자 이동을 개시했다. 이에 말버러 공작은 네덜란드 장군들에게 프랑스군에 대항해 오우데나르데 마을을 장악하고 있으라고 명령한 뒤 본대를 이끌고 오우데나르데 마을로 향했다. 또한 말버러 공작의 병참 장교 카도간은 연합군 선두 부대와 함께 오우데나르데 북쪽 강둑에 도착해 폰툰 다리를 조립했다.
이후 비론 후작의 지휘하에 오우데나르데 마을을 향해 이동하고 있던 전진 근위대는 카도간의 기병대에게 기습당하고 나서야 그들의 존재를 알아챘다. 비론 후작은 급히 상황을 살핀 후 적 기병대가 강을 건너 카도간과 합세하려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비론 후작은 근위대를 후퇴시킨 후 방돔 공작에게 이 소식을 알렸고, 방돔 공작은 전투를 결심했다. 이리하여 플랑드르의 패권을 둘러싼 양측의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
- 명목상 총사령관: 부르고뉴 공작 루이
- 실질적 총사령관: 방돔 공작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
- 병력: 124개 보병 대대, 197개 기병 대대, 대포 120문, 95,000명
3.2. 영국-오스트리아-네덜란드-프로이센 연합군
4. 전투 경과
방돔 공작은 비론 후작의 첩보를 접한 뒤 적군의 상당수가 아직 스켈드 강 건너편에 있다고 판단하고 먼저 건넌 적부터 요격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프랑스군에게 노르켄 강 동쪽에서 오우데나르데 고지대를 따라 대열을 형성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스위스 연대와 빌라르, 그레더 연대 등 7개 프랑스 보병 대대는 헤른 마을을 장악하고 고지를 점거하는 임무를 맡고 이동했다.그런데 여기서 부르고뉴 공작이 딴지를 걸었다. 그는 방돔이 일 처리를 지나치게 경솔하게 했다고 여기고 군대에게 노르켄 강 서쪽에 있는 고지대에 위치를 사수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앞서 받은 임무를 수행 중인 7개 대대를 제외한 프랑스군은 부르고뉴 공작의 새 명령에 따라 노르켄 강 서쪽의 고지대에 배치되었다. 게다가 7개 보병 대대 지휘관은 점령하도록 지시받은 마을을 착각하고 오우데나르데와 가깝고 헤른 마을보다 훨씬 더 적에게 노출된 장소인 아이네로 진군해버렸다.
적의 이같은 움직임을 확인한 말버러 공작은 본대와 떨어져 있는 7개 보병 대대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카도간의 보병대는 아이네로 진격했고, 기병대는 프랑스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헤른 마을 후방으로 선회했다. 이후 프랑스 7개 대대는 적의 협공을 버티지 못하고 모두 죽거나 항복했다. 이후 하노버 왕자 게오르크[2]가 지휘하는 연합군 기병대는 7개 보병대를 지원하러 달려오고 있던 프랑스군을 공격해 물러서게 했지만, 그 과정에서 게오르크 왕자의 말이 총탄에 맞는 바람에 왕자가 낙마하여 찰과상을 입었다.
한편 부르고뉴 공작은 적이 대대적으로 공격할 것을 예상하고 방어 준비를 갖추게 했다. 그러나 말버러 공작의 연합군은 아직 전투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오후 4시, 연합군의 공격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부르고뉴 공작은 적이 공격해오지 않는다면 차라리 자기가 직접 노르켄 강을 가로질러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방돔 공작이 "섣부른 공격은 위험하다."며 말렸지만, 부르고뉴 공작은 이를 무시하고 중앙과 우익군을 출격시키고 기병대를 앞서 보내 강을 가로질러 적을 치게 했다.
말버러 공작은 적이 이동하는 걸 보고 즉시 지금까지 스켈드 강을 건너온 연합군에게 전투 대형을 갖추라고 명령했으며, 영국군 12개 보병 대대를 최전선에 이동시키고 영국, 프로이센 기병대를 베베른과 헤른 고지에 주둔시켰다. 또한 카도간은 프랑스군의 공세에 노출된 그로네발트 마을에 2개의 프로이센 보병 대대를 배치시켰다. 오후 5시 30분 경, 30개 프랑스 보병 대대가 그로네발드에 있는 2개의 프로이센 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연합군 지원 병력이 도착하면서 양측은 마을을 중심으로 격렬한 육탄전을 벌였다.
그 동안 더 많은 연합군 부대가 스켈드 강을 건너 대열을 형성했고, 프랑스군은 노르켄 강을 넘어 공세에 가세했다. 이때 외젠은 18개 대대를 급히 파견해 아군의 우측면을 보강하게 해 말버러 공작을 도왔다. 이후 양측은 교착 상태에 빠졌지만, 절반 가량의 프랑스군이 노르켄 강을 건너 방어선을 연장하기 위해 이동하지 않고 제 자리에 머물렀다. 이 사실을 파악한 말버러 공작은 프랑스 우익의 대열이 끝나는 지점에 네덜란드와 덴마크 20개 보병대대를 파견했다. 네덜란드 장군 오버크리크 백작 헨릭 데 나사우 휘하의 기병대는 이 보병 대대를 후원하고자 프랑스 우익의 후방으로 우회해 프랑스 기병대를 격파했다. 이후 프랑스 우익은 적 보병대와 기병대의 합동 공격에 짓눌러 무너지기 시작했다.
방돔 공작은 우익을 구원하고자 아직 합류하지 않은 프랑스군을 동원해 우익 구원에 투입시키려 했지만 적의 훼방으로 그러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둠이 깔리면서 연합군이 더이상 공세를 가하지 않자, 방돔 공작과 부르고뉴 공작은 급히 군대를 수습한 뒤 겐트로 퇴각했다. 이리하여 오우데나르데 전투는 연합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