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엘리자베스 롤리 Elizabeth Rowle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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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9년 ([age(1949-12-31)] - [age(1949-01-01)]세) |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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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앨버타 대학교 |
종교 | 무종교 |
직업 | 정치인 |
소속 | 캐나다 공산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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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엘리자베스 '리즈' 롤리는 캐나다의 사회운동가이자 캐나다 공산당의 당대표이다.2. 생애
1949년 캐나다 서부의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서 출생하였다. 앨버타 대학교로 진학한 1967년에 캐나다 공산당에 가입했다. 아직 20대였던 1972년에 공산당의 추천을 받아 캐나다 연방 선거 Edmonton—Strathcona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당시 선거 플랫폼은 반자본주의와 더불어 베트남전 반전 및 낙태권 등 범좌파적 사회운동 전반의 가치를 담았다. 그러나 캐나다 공산당 소속으로 출마한 것은 아니었고, 무소속 출마였다.낙선 후 1973년부터 온타리오 주 공산당 집행위에 참여하였으며, 줄곧 온타리오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노동자로서 롤리는 인쇄공으로 일했으며, 인쇄공으로서 노동조합 운동과 각종 노동 쟁의에 참여하였다. 주요 투쟁으로는 1981년 해밀턴 스틸코(Hamilton Stelco) 파업이 있다. 이 파업은 총 26,000명의 노동자가 참여하여 125일 간 지속되었다. (당시 뉴욕타임스 기사) 여담이지만 롤리는 당시 같이 파업하던 제철노동자와 결혼하고 두 명의 자녀를 두게 된다.
롤리의 주요 운동 의제는 생활권 보장과 노동권 그리고 여성 인권, 캐나다의 자립[1] 등이었다. 비록 21세기에 들어 캐나다는 여성인권과 양성평등이 (특히 미국에 비해) 잘 보장된 나라로 인식되고 있으나, 1970년대 당시 캐나다는 여성인권은 물론 흑인 혐오가 팽배할 정도로 보수적인 국가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롤리의 집은 반동주의자들의 방화로 홀라당 타버리는 등, 실질적 위협을 감수하며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1988년 롤리는 온타리오 공산당의 당수로 선출되었고, 이로서 연방 당에도 주요 인사로 자리매김하였다. 결국 2016년 1월 30-31일에 개최된 캐나다공산당대표자회의에서 당대표로 선출된다. 캐나다 공산당 역사상 최초의 여성 당대표이다.
1990년대 이후 캐나다 공산당 내에서 롤리의 약진은 소련을 포함한 동구권의 현실사회주의국가들이 무너지면서 캐나다 공산당의 미래 노선이 모호해지던 시기 세대교체를 위한 당적 움직임의 일환이었다. 롤리를 포함해 미구엘 피게로아(Miguel Figueroa)[2] 등 캐나다 공산당의 지방, 연방 당직을 차치한 새 세대는 사상적으로는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현실적으로는 캐나다 보수당을 포함한 반동 정치 세력들의 공산당 파괴 획책 등에 대응하며 캐나다 공산당의 체질을 오늘날 우리가 아는 캐나다 공산당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실제로 현재 캐나다 공산당의 당권파는 이 세대에 속한다. (통상적 세대론에서는 '부머'로 불리는 세대인데, 다른 연방 정당에 비해 당권을 가진 세력이 매우 고령이라는 문제가 있다.)
롤리와 피게로아를 필두로 한 캐나다 공산당의 21세기 체제는 생산수단의 소유를 골자로한 계급의 철례와 반제반자본주의라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본적 이념을 견지한 채 풀뿌리 노동조합 운동을 중심으로 한다. 그러나 이 체제가 이전 캐나다 공산당과 다른 점은 매우 온전한 수준의 민주사회주의를 표방한다는 것이다. 매번 선거마다 후보를 냄으로서 연방 정치에 자신들을 노출시키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젠더이슈(낙태, 동성애, 트렌스)나 환경이슈 등 전통적인 의미의 공산주의 사상에서 잘 다루지 않던 문제들도 의제에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