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지내리에서 양해요씨의 이남으로 서기 1882년 6월 3일 출생하시어 관은 남원이요, 호는 단산 목사공 휘언연의 29세손이다.
선생은 명문에서 태어나 엄숙한 가훈아래 면학정진하여 한학에 대한 조예가 깊어 사서삼경에 정통하였다.
후배 양성에 애국충절의 지조를 확고히 함을 강조하셨고 경술국치 후 비분분개하여 기어히 조국광복을 성취하여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의병장 이강년 휘하에서 의병항쟁에 활약하다가 기후 서간도 방면의 회인현 지방으로 망명하여 투쟁하시다 전남포 경유로 귀국하여 서울에 체재 중 기미년 2월에 민족대표의 한 분인 정춘수로부터 독립선언서 수 십매를 받고 고향에 돌아와 영동부근의 동지를 규합하고 다시 선언서를 옥천 이원 무주 금산 등지에 배포하여 이 날의거사를 서둘렀던 것이다(독립운동사 제3권 94면 기재).
때마침 그 해 3월 1일에 독립우녿이 전개되자 절호의 시기로 분영권릭하여 학산 양산면민의 선두에서 항일 구국하자고 창의하셨다.
이 해 3월 3일 하오 4시경 학산면 금산리 시장에서 약 300여명의 군중이 이에 호응하여 선새으이 지휘하에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치면서 시위운동 전개하였고 같은 날 밤8시경 나는 군산에서 온 국민대표 양봉식이다라며 군중을 이끌고 면사무소에 돌진하여 일제의 침략거점을 파괴하였다(독립운동사 제5권 1123,4,5면 기재).
선생은 이로 인하여 왜경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으로 구혈기절함이 비일비재하였으며 3년간 옥고 중에도 초지일관 항일투쟁으로 시종하였다. 선생은 옥중작품으로 결사포고문이 있으나 시수 2수만을 소개한다.
일편단심 지사불면 단의복지 표리일색.
이 위대한 애국충서를 영원히 기리고 후진들의 귀감이 되도록 선생의 묘전에 이 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