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4 13:36:44

양곡(후한)

梁鵠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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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중국 후한 말의 서예가. 자는 맹황(孟皇). 옹주 안정군 오씨현 사람.

2. 생애

어려서 글씨를 잘 써 효렴으로 천거되면서 낭관이 되었다가 후에 영제가 시중(侍中)을 지내던 양곡을 선부상서(選部尙書)로 삼았으며, 그를 중시해 천하에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모두 홍도문으로 모이게 했을 때 악송, 강람, 임지, 가포, 극검, 사의관 등과 함께 홍도문에 있었다. 당시에 사의관에게 글씨를 배우고자 했지만 그의 성품이 오만해서 가까워지기 힘들어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사의관이 술집에 마시다가 한바탕 글씨를 쓰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가 술집에 있는 것을 보고 나무관을 가져와 벽에 걸어뒀는데, 그대로 사의관이 술에 취해 나무판에 글씨를 쓰자 그대로 가져가 서체를 습득했다.

한편 양주자사를 지낸적도 있는데, 이런 일화도 있었다.

양주자사 양곡은 귀족과 외척들을 두려워하였는데, 이에 소정화를 죽여 그들의 원한을 사지 않으려고 하였다. 양곡은 이 일을 갑훈과 의논하였다. 갑훈은 본래 소정화와는 숙적 관계였는데, 어떤 이는 이를 기회 삼아 소정화에게 보복하면 어떻겠느냐고 권하였다. 이에 갑훈이 말하였다.
안 된다. 선량한 자를 죽이려 하는 것은 충의가 아니며, 다른 사람의 위기를 틈타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갑훈은 또한 양곡에게 간언하였다.
매를 기르는 것은 사냥을 시키기 위함이 아닙니까? 사냥이 끝났다고 매를 삶아 죽이는 것에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양곡은 갑훈의 말을 옳게 여겨 소정화를 죽이지 않았다.

광화 7년(184년), 황건적이 봉기하였다. 이에 양곡은 전 무위태수인 황준(黃雋)을 불러들였으나, 기일을 맞추지 못하였다. 이에 양곡은 황준을 상주하여 주살하려 하였는데, 갑훈이 나서서 황준을 구해 주었다.

전란을 피해 형주로 달아났다가 조조가 형주를 점령했는데, 양곡이 선부상서로 있을때 조조가 젊은 시절 그를 찾아가 낙양현령 자리를 원했지만 양곡은 조조가 출신이 나쁘고 품행이 방정하다고 해서 반대해 조조는 북부도위가 되었다 이에 조조가 양곡에게 원한을 품었다.

그 일로 조조를 찾아가 용서를 빌었으며, 조조가 그의 글씨를 아꼈기 때문에 군가사마로 임명되어 비서령에서 글씨를 쓰게 되었다. 조조는 양곡의 글씨를 벽에 걸어놓고 감상하면서 사의관보다 낫다고 여겼으며, 궁전의 제서들은 대부분 양곡의 글씨였다고 한다. 그의 제자로는 모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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