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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알바당 당수 알렉산더 엘리어트 앤더슨 새먼드 Rt Hon. Alexander Elliot Anderson Salmo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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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265CB3> 본명 |
알렉산더 엘리어트 앤더슨 새먼드 Alexander Elliot Anderson Salmond |
출생 | 1954년 12월 31일 |
영국 스코틀랜드 웨스트로디언 린리스고 | |
사망 | 2024년 10월 12일 (향년 69세) |
북마케도니아 오흐리드 | |
학력 |
린리스고 대학교 에든버러 무역 대학교 (무역학 / HNC)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 (중세사학, 경제학 / M.A) 에든버러 대학교 (명예 박사) |
종교 | 개신교 ( 장로회, 스코틀랜드 교회) |
가족 |
아버지 로버트 새먼드, 어머니 매리 새먼드 부인 모이라 맥글래션 |
의원 선수 | 6 |
의원 대수 | 50, 51, 52, 53, 54, 56 |
지역구 |
반프&부컨 (1987 - 2010) 고던 (2015 - 2017) |
소속 정당 | 알바당 |
약력 |
영국 서민원 의원 스코틀랜드 의회 의원 스코틀랜드 자치 정부 수반 스코틀랜드 국민당 부당수 스코틀랜드 국민당 당수 |
서명 |
|
[clearfix]
1. 개요
스코틀랜드의 정치인, 독립운동가. 스코틀랜드 국민당의 당수와 영국 서민원 의원을 역임했고, 2007년부터 2014년까지 7년 동안 스코틀랜드 자치정부의 수반이었다.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2018년 성추행 논란이 있었으나, 2020년 최종적으로는 무혐의 판결을 받음에 따라 정치적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했다.2. 생애
1954년 스코틀랜드의 린리스고에서 로버트 새먼드[1]와 매리 새먼드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로열 네이비에서 복무한 적이 있었고, 양친이 모두 독실한 장로교 신자였던 관계로 알렉스 새먼드 역시 장로교를 믿고 현재도 린리스고 장로교회에 꾸준히 다닌다.1966년, 린리스고 대학교에 입학했으며 1972년 에든버러 무역 대학교[2]에 진학해 무역학 석사 학위를 받는다. 1973년에는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에 편입되었다. 1977년에는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 학생 부회장을 맡았고 얼마 뒤에는 세인트 앤드루스 지역의회 의원으로도 선출되었다. 1978년 5월, 그는 중세 사학, 경제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졸업 직후에는 로열 뱅크에서 일하기도 했다.
2.1. 정치 활동
대학교에 다니던 도중에 인생을 바꾸는 일이 일어났다. 1973년, 그와 사귀던 여자친구 데비 호튼(Debbie Horton)[3]이 새먼드와 헤어지면서 '그렇게 하고 싶으면 망할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이나 하라.'고 한 것. 여기에 빡친 새먼드는 홧김에 스코틀랜드 국민당에 입당했다(...). 참고로 당시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 내에서 SNP 당비를 제대로 내던 사람이 새먼드와 함께 입당한 친구까지 단 두 명(...)뿐이었기 때문에 그는 단숨에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 SNP 당원 클럽의 사무총장이 되었다.1982년 IRA를 공개 지지하는[4] 무리수를 두는 바람에 정치적인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간발의 표차로 스코틀랜드 국민당 내에서 제명이 저지되었고 이후 활발히 당내 활동을 하며 야금 야금 당내 지분을 늘렸다. 1987년 총선에서 반프&부컨(Banff and Buchan) 선거구에 출마했는데, 당시 3선에 도전하던 보수당의 앨버트 매퀘리 후보를 꺾고 근소한 표차로 당선되었다. 그는 당시 스코틀랜드 국민당 소속으로 당선된 국회의원은 새먼드까지 3명뿐이었으므로 당연히 당내 지분이 급격히 늘어났다.
1990년, 초선 의원으로 스코틀랜드 국민당 당수직에 도전했으며 압도적인 표차로 경쟁자를 꺾고 스코틀랜드 국민당의 당수가 되었다. 1997년 노동당의 대선전에도 불구하고 의석수를 4석에서 6석으로 늘려 힘을 얻은 뒤, 그는 일부 스코틀랜드 국민당 강경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토니 블레어 총리와 협상해 스코틀랜드 자치정부를 출범시켰다.[5] 1999년 나토의 세르비아 공습을 반대하며 화제가 되었다. 당수 시절에는 급진좌파 색채를 드러내지 않고 좌우파 모두를 만족시키는 대의를 내세워 이례적으로 주류 언론에게서도 고평가를 받게 된다. 특히나 선거 당시 젊은층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모습이 큰 호응을 얻어, 그의 당수 임기 동안 스코틀랜드 국민당의 지지율은 폭증하였다.
그러던 2007년 스코틀랜드 자치 의회 선거에서 SNP는 47석을 얻어 의회 1당으로 올라섰고, 스코틀랜드 자치의회 의원직을 역임하던[6] 새먼드는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직에 올랐다. 2011년 자치 의회 선거에서는 전체 129석중 69석을 쓸어담는 압승을 거둬 재선에 성공했다. 이후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를 실시하며 사상 최초의 스코틀랜드 총리가 되는 듯했다. 그러나...
결국 독립에 실패하면서 책임을 지고 자치정부 수반직에서 내려왔다. 후임은 니콜라 스터전. 제56회 영국 총선에 출마해 고던 선거구에서 6선에 성공하지만, 제57회 영국 총선에서는 패배해 의원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던 2018년, 성추행 문제가 터지면서 제58회 영국 총선에는 불출마했다. 그러나 2020년 최종적으로 무혐의 판결을 받으면서 스코틀랜드 국민당의 지지율이 폭등했고, 여론조사에서 한두 곳을 제외한 전 지역구에서 승리하는 결과가 나와 새먼드가 서민원에 복귀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2021년 스코틀랜드 자치의회 선거 앞두고 일명 알바당이라는 신당을 창설했다. # 여기서 알바는 아르바이트의 줄임말이 아니라 스코틀랜드를 칭하는 게일어 낱말이므로, 알바당이란 곧 '스코틀랜드당'이라는 뜻이다. 급진적인 스코틀랜드 분리독립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1.7% 득표에 그치며 자치의회 의석을 1석도 확보하지 못했다. 새먼드는 "창당한 지 얼마 안 된 점을 고려할 때 믿음직한 성과"라고 자평했지만 비평가들은 이 정당의 존재가 오히려 스코틀랜드 국민당과 니콜라 스터전에게 도움을 준 것에 불과했다고 평가했다.
2024년 영국 총선에서는 원외정당으로 전락했다.
2024년 10월 12일 북마케도니아 오흐리드에서 포럼 참석차 방문 중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3. 정치 성향
상당한 좌파 성향이지만 자신의 뜻을 숨기고 의외로 급진좌파 성향은 보이지 않는 편이다. 젊은 시절에는 IRA를 지지하는 등 극좌적인 행보를 보였지만 최근에는 당원들의 결속력을 높이기 위해 민족주의를 제외한 나머지 분야에서는 큰 목소리를 내지는 않다.4. 논란
4.1. 자치정부 여직원 성추행, 강간 미수 논란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혐의로 결정되었다.알렉스 새먼드가 스코틀랜드 총리 시절인 2013년에 자치정부 여직원을 성추행하고 강간을 시도했다는 주장 #이 2018년에 터져 나와 계속 논란이 이어졌다. 알렉스 새먼드는 본인의 무고함을 주장하며 당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탈당했고, 그 상태에서 본인의 혐의를 벗으려고 시도했다. 한편 새먼드는 그 과정에서 스코틀랜드 자치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성추행 주장이 접수되고 자치정부에서 새먼드를 내사하는 과정에서 위법 행위가 있었다는 것.
새먼드는 2019년 새해 벽두에 이 소송에서 승소했으나 #, 이 사태의 본질인 성추행 여부에 대해서는 계속 논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사건 때문에 본인의 후임자인 니컬라 스터전과도 관계가 불편해졌다. 결국 1월 24일 스코틀랜드 경찰에 의해 두 건의 강간 미수를 포함하여 혐의 14건으로 구속기소되었다. # 그러나 2020년 3월 23일에 에든버러고등법원은 알렉스 새먼드에게 걸린 혐의 14건 중 12건을 무죄, 1건이 증명되지 않음, 1건은 기소 중지로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
5. 여담
- 아내 역시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을 한 프랑스계 스코틀랜드인이다.
- 2014년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투표 전에, BBC와의 인터뷰에서 배수의 진을 칠 의도로 "독립 투표는 한 세대에 한 번"이라고 발언했는데, 부결된 이후 보수당에서 재투표를 거절할 목적으로 이 발언을 인용해서 반박하곤 한다.
- 하트 오브 미들로시언 FC의 서포터이다.
[1]
1921년 생으로, 무려
2017년까지 96세로 장수했다.
[2]
에든버러 대학교와는 다른 대학교이다.
[3]
런던 출신으로, 당시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의 노동당 당원 클럽 사무총장이었다. 참고로 1970년대에는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이 거의 정신병 비슷하게 취급받았다.
[4]
IRA가 활발히 활동하던 70-80년대에는 북아일랜드 독립 문제를 언급하기만 해도 큰 논란거리가 되는 일이 잦았다. 오죽했으면 당시 영국 최고 인기 가수였던
폴 매카트니가 북아일랜드 독립을 주장하는 노래를 발표하자, 해당 곡이 BBC에서 방송금지곡으로 지정되고 사회적인 지탄을 받았을 정도.
[5]
토니 블레어는 당시 노동당의 표를 갉아먹으며 점차 목소리를 높여가던 스코틀랜드 독립 진영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의도로 자치정부를 출범시켰기 때문에 국민당 강경파가 반대하였다.
[6]
참고로 영국은 자치의회 의원, 자치정부 수반과 서민원 의원을 겸직하기가 가능하다.
보리스 존슨도 런던 광역시장 임기 말에 잠깐 서민원 의원을 겸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