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0:37:02

안국형(1909)

파일:안국형.jpg
성명 안국형(安國亨)
이명 안명보(安明保), 전학송(全鶴松)
생몰 1909년 1월 8일 ~ ?
출생지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신덕동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안국형은 1909년 1월 8일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신덕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십대 때 단신으로 만주로 망명해 1922년 8월에 조직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입했으며, 1924년 11월 25일 길림에서 조직된 정의부(正義府)에 가입했다. 그는 1928년 9월 1일 정의부 제2중대장 이윤환(李允煥)의 지시를 받고 이진무, 홍학순, 이원(李園) 등과 함께 요녕성 토성자에 거주하는 밀정 최상진(崔尙鎭)을 사살했다. 또한 그는 1930년에 조선혁명군에 참여해 여러 차례 국내에 진입해 군자금을 모금했고, 그해 봄에는 국민부 간부들이 군자금을 낭비하자 이진무와 함께 그들을 죽이려 흥경현에 갔지만 중국 관헌들의 방해로 일을 이루지 못했다.

1931년 2월 7일, 안국형은 관전현 나한구에 거주하는 김석영(金錫英)의 집에서 이진무, 박인홍(朴仁弘), 황세일(黃世日), 최영걸(崔永杰), 전광도(全光道), 조국원(趙國元) 등과 함께 노동자위군(勞動自衛軍)을 조직했다. 이진무는 노동자위군 대장이 되었고, 음력 4월에 조직 명칭을 재만조선인혁명군(在滿朝鮮人革命軍)으로 개칭했다. 이후 안국형은 1931년 10월 4일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이해산(李海山), 이진무 등과 함께 국내에 잠입해 동년 10월 귀성군 내양동과 귀성군 산서면 신덕동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했다.

그러나 1932년 2월 만주 안동현에서 이진무와 함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그는 1933년 6월 26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강도, 살인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후 1934년 1월 29일 평양복심법원에서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이후에 감형되어 15년 정도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안국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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