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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2세기 아나톨리아 동부의 아흘라트를 중심으로 반호 연안 일대를 통치한 오우즈 튀르크계 왕조. 1차 아나톨리아 베이국 중 하나로, 12세기 중반에 번영했다. 아흘라트샤, 쇠크멘, 베그티무르 왕조 등으로도 불린다.2. 역사
1185-93년 통치한 길만 사이프 엣딘 베그티무르의 주화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후 셀주크 제국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이 친히 나아가 점령한 후 튀르크멘 맘루크 지휘관 쇠크멘 엘쿠트비 (Sökmen el-Kutbî)에게 영지로 하사했다. 혹은 말리크샤의 사촌 쿠트뷧딘 이스마일 일아르슬란 휘하의 길만 (노예 에미르) 쇠크멘이 주군의 전사 후 아흘라트 주민들의 요구로 마르완 조를 축출하고 셀주크 제국의 명으로 도시 장악했다고 한다. (1100년)
이후 정복 활동에 나선 그는 반 호수 서쪽과 북쪽을 점령하며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특히 실반 (마야파리킨)까지 수중에 넣으며 자지라 지방의 주요 세력 중 하나로 부상하였다. 그럼에도 쇠크멘은 셀주크 술탄 무함마드 1세에 충성하며 십자군 전선 등에서 활약하였고, 그 대가로 1110년 아흘라트를 이크타 (영지)로 하사받았다. 이로써 쇠크멘은 아흘라트를 중심으로 한 세습 왕조를 확립했다. 아흘라트샤 왕조는 아르메니아의 샤란 뜻인 샤-이-아르만 (샤아르멘스), 쇠크멘르 왕조 등으로도 불렸다.
1111년, 재차 에데사 백국 공격에 참가한 쇠크멘은 그해 8월 투르베셀 포위 사망하였다. 그의 관은 아흘라트로 보내졌고, 아들 자히렛딘 이브라힘이 계승하였다.아흘라트 샤들은 셀주크 제국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다만 북쪽의 살투크 왕조와 연합하여 조지아 왕국을 공격하는 등 자체적인 활동에 나설 때도 있었고, 서남쪽 마야파리킨의 아르투크 왕조와도 좋은 관계를 맺어 아나톨리아 동부와 메소포타미아 북부 간의 연결로 역할을 하였다.
아흘라트샤 왕조는 나시룻딘 쇠크멘 2세 (1128-85년)의 57년 치세에 전성기를 맞았다. 그는 살투크 2세의 에르주룸의 살투크 왕조 공주 샤흐바누와 결혼해 양국의 동맹을 굳혔고, 함께 여러 건설 사업들을 벌였다. 1164년 샤흐바누는 폐허 상태이던 아흘라트 시타델과 인근 도로 복구하였고, 낡은 목조 다리를 석조로 교체하였으며 시내에 큰 여관 (카라반사라이)을 세웠다. 또한 그녀는 건축가 카라쿠쉬를 고용하였고, 그는 불과 몇달 만에 여러 건축물을 완공하였다. 다만 이들은 1229-30년 화레즘샤 잘랄 웃 딘 밍부르누의 포위 시에 파괴되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쇠크멘 2세는 아흘라트 ~ 타브리즈간 카라반 교역로 상에 있는 코이의 서쪽에 자신의 이름을 딴 수크마나바드를 세웠다. 다만 아직 그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1185년 그들이 자녀를 남기지 못한 채로 사망한 후 아흘라트샤 왕조는 1207년까지 혼란을 겪는다. 쇠크멘 2세의 사후 왕가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길만 장군들이 집권하였고, 그렇게 20여년이 흐른 후 1207년 아흘라트샤 왕조는 오랫동안 아흘라트를 탐내던 아이유브 왕조에게 병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