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27 20:22:04

아르망드-세사리 스타디움 참사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프랑스 축구장 붕괴.jpg

1. 개요2. 불안한 시작3. 사고 당일4. 사고 이후

1. 개요

Catastrophe de Furiani

1992년 5월 5일 프랑스 코르시카 섬에 위치한 아르망드-세사리 스타디움에서 일어난 붕괴사고

2. 불안한 시작

파일:프랑스 축구장 임시 스탠드.jpg

아르망드-세사리 스타디움은 푸리아니 스타디움이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SC 바스티아가 주로 경기를 펼친 곳이었다. 당시 SC 바스티아는 AS 낭시를 꺾고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간의 쿠프 드 프랑스 준결승 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장피에르 파팽, 크리스 워들, 아베디 펠레, 디디에 데샹 같은 유명 선수들이 참가하는 경기인 만큼 사람들이 많이 몰릴 것은 뻔했다.

경기장에선 사람을 한명이라도 더 수용하기 위해 임시 스탠드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AS 낭시와 경기를 펼칠때 설치했지만, 그것으론 부족하다 여겨 그때 세운 임시 스탠드를 철거하고 새로 세우기로 했다. 새로 계획된 임시 스탠드를 세우면 이론상 9,300여명의 관중을 더 수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준결승 경기까지 2주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급히 새 스탠드를 디자인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기존 스탠드가 안좋은 것도 아니기에 철거 허가가 떨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경기장 측에선 밤중에 몰래 스탠드를 철거하고 새로 세우기로 했다. 다음 날, 갑자기 멀쩡하던 스탠드가 사라지고 새로 짓고 있는 걸 보고 놀란 관계자가 많았다. 하지만 이미 새 스탠드를 공사하는 중이라 어찌 할수가 없었다. 경기장에선 새 스탠드 설치를 위해 회사 Sud Tribune과 계약을 맺었고, Space Locations와도 계약을 맺으려 했으나 시간문제로 하지 못했다.

그런데 스탠드를 세우는 과정에서 또다시 잡음이 발생했다. 섬에 있던 경기장 특성상 공사를 하려면 육지에서 재료를 받아와야 했다. 하지만 공사를 시작한 4월 28일, 마르세유 항구에서 파업이 일어나 주요 주품을 전달받지 못했다. 프랑스 축구 연맹측에선 경기를 미루진 못한다 얘기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공사 계약을 맺은 Sud Tribune이 "섬 내에서 구할수 있는 재료들로 해결이 가능하다." 면서 공사를 속행했다. 스탠드가 완공되고, 경기장 수용 인원은 2배 가까운 최대 18,000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프랑스 축구 연맹이 스탠드 안전 검사를 하고 허가하기 전 까진 티켓을 판매할 수 없었다. 프랑스 축구 연맹은 현장에 와 조사를 하고 안전하다 평가를 내렸다. 이후 경기장 측은 인원이 늘어난 만큼 돈을 더 벌려고 전보다 75%나 가격을 올려서 티켓을 팔았다. 하지만 소방관이 한 평가에서는 안전하지 않다 평가를 내렸다. 그래서 경기 시작에 앞서 급히 긴급 보수 작업을 해야했다.

3. 사고 당일

경기가 열리는 날, 시작 90분 전에도 사람들이 꽉 찼다. 새로 지은 스탠드 석도 꽉 찼다. 그러나 건축을 모르는 사람들이 봐도 문제가 느껴질 정도로 새로 새운 좌석들에 문제가 있었다. 삐꺽거리는 소리가 난다거나, 스탠드가 흔들리기도 했다. 불안해 하는 팬들도 있었지만 별거 아니라 생각하고 위에서 경기장을 찍는 팬들도 있었다.

오후 8시가 되고 선수들이 경기장에 입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탠드는 더 심하게 흔들렸고, 사람들은 불안에 떨었다. 급히 엔지니어가 와서 볼트를 더 조이는 등 긴급조치를 취했음에도, 계속해서 흔들렸다. 경기 시작 15분 전, 선수들이 탈의실에 입장했을 때 스탠드는 더 심각하게 움직였다. 경기장측에선 너무 움직이면 스탠드에 무리가 갈수 있으니 침착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경기 시작 10분 전, 결국 관중들의 무게를 못이긴 불안정한 스탠드 일부가 무너졌다. 그 위에 있던 2,000여명의 관중들과 기자들은 순식간에 떨어졌다. 무너지면서 스탠드는 박살났고, 나무와 철근은 흉기가 되어 떨어진 사람들을 베고 찢었다. 아예 금속봉에 관통당한 사람도 있었다. 무너지는 걸 본 사람들은 겁에 질려 스탠드에서 벗어났고, 경기를 보러 온 사람들은 물론이고 선수들 까지 사고현장에 달려와 구조를 도왔다. 경기장은 임시 구급소로 활용됐고, 얼마 안가 구급헬기가 도착해 위급한 환자들을 이송했다. 급히 광고판을 뜯어내 임시 들것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코르시카 섬 내의 병원이 환자들로 가득 차 헬기가 섬을 떠나 인근 니스와 마르세유까지 가야했다.

결국 사고로 19명이 사망했다. 부상을 입은 사람도 2,000명 가까이 됐다. 경기장이 있던 코르시카 섬은 인구가 많지도 않았고, 섬 인구 대다수가 사망자와 친인척 사이라 섬 전체가 비통에 빠졌다. 사고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스포츠 사고로 기록됐다.

4. 사고 이후

경기장에 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들여보내겠다고 갑작스레 공사를 시작해 불안정한 스탠드를 세워 사람을 죽게 만든 것 때문에 경기장측은 큰 비난을 받았다. 이들은 소방당국에서 안전검사에 불합격을 받은 뒤 공사를 다시하고도 검사는 다시 받지 않았다. 더군다나 가격이 갑자기 오른 것도 프랑스 축구 연맹에는 얘기하지 않고 무작정 올린것으로 드러났다.

사고와 관련해 건설을 책임졌던 매니저에게 2.5년형이 내려졌다. 또 사고와 관련된 7명에게 징역형이 내려졌다. 바스티아 회장은 재판 2일 전 총에 맞아 살해당했다.

경기장은 사고 이후 스탠드 하나를 제외하곤 전부 철거 후 다시 짓기 시작했다. 1997년에 다시 오픈했고, 이젠 최대 수용인원이 18,000명에 달한다.

1988년 파리 리옹역 열차 충돌사고로 가족을 잃은 자크 브레송은 같은 해 에어버스 A320 시연회 추락사고 1991년에 있었던 프랑스 스파 화재 #, 그리고 이 사고의 희생자 유가족 단체들과 뜻을 합쳐 1994년에 "프랑스 재난과 테러 희생자 연합(FENVAC)" 를 결석, 수사와 재판에 참여할 권리를 획득해 프랑스 법무부의 공식 등록단체가 됐다.

사고 이후 5월 5일마다 경기장에선 추모식이 열린다. 경기장엔 추모비가 새워져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