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의 前 축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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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72a> 이름 |
Araken 아라킨 |
<colcolor=#008558> 본명 |
아브라헝 파투스카 다 시우베이라 Abraham Patusca da Silveira |
생년월일[1] | 1905년 7월 7일 |
사망년월일 | 1990년 1월 24일 (향년 84세) |
국적 |
[[브라질|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산투스(브라질) |
포지션 | 센터 포워드 |
신체조건 | 173cm / 62kg |
등번호 | -[2] |
소속팀 |
산투스 FC (1923-1929) 아틀레치쿠 파울리스타누 (1925) CR 플라멩구 (1930) 상파울루 FC (1930-1935) 산투스 FC (1935-1937) |
국가대표 | 1경기 0골 ( 브라질 /아버지30) |
1. 생애
1.1. 클럽
아라킨의 선수 생활은 산투스 FC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가 당시 산투스 클럽의 회장이자 설립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아라킨이 15살 때 그는 단순히 아버지와 함께 산투스의 친선 연습경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따라 공격수를 맡았던 에드가 마르케스가 변변치 않은 활약으로 빠지게 되었고, 아라킨이 그 자리에 땜빵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아라킨은 4골을 퍼부으며 산투스의 5대5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1925년에는 CA 파울리스타누와 함께 유럽 투어를 돌기도 했다.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의 투어였고 여기서 뛰어난 활약으로 프랑스 사람들의 주목을 이끌어냈다.
이후 산투스에 돌아와서 그는 열심히 뛰었지만 팀은 3연준의 신화를 썼고, 아라킨은 그에 실망한 것에서 출발하여 친정팀 산투스와 사이가 나빠졌다. 당시 그는 193경기에 출전 182골을 기록하는 엄청난 골 페이스를 올렸음에도 팀이 우승하지 못한게 원인이었다. 결국 캄페오나투 카리오카로 떠나 1년간 CR 플라멩구에서 뛰다가 상파울루 FC로 다시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누로 복귀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첫 우승을 차지하였다.
산토스에는 1935년에 다시 돌아왔고 돌아온 해에 꿈에도 그리던 산투스에서의 첫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누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그는 1937년, 32살의 젊은 나이에 축구화를 벗었다.
1.2. 국가대표
나름 브라질 리그에서는 명성을 날리던 공격수였지만 브라질 대표팀과는 큰 인연이 없었다. 1929년 1월 아르헨티나의 클럽팀인 바라카스와의 경기에서 브라질 대표팀 유니폼을 처음 입었지만 공식 경기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그의 유일한 대표팀 경기는 초대 월드컵 예선 첫 경기인 대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였다. 하지만 당시 브라질 대표팀의 파벌 싸움[3]으로 인해 그 역시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팀의 패배를 막을 수 없었다. 2차전 볼리비아전에서 그는 벤치를 지켰고,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그의 월드컵 출전기록 이자 국가대표팀 기록이다. 브라질은 2라운드 진출에 실패하였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빠르면서도 기술적인 플레이로 많은 득점을 올린 스트라이커였다.3. 뒷 이야기
- 그는 산투스의 1000번째 득점 기록의 주인공이다.
4. 수상
4.1. 클럽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누 우승 2회: 1931( 상파울루 FC), 1935( 산투스 FC)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누 준우승 1회: 1925(CA 파울리스타누), 1927, 1928, 1929(이상 산투스 FC)
4.2. 개인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득점왕 1회: 1927( 산투스 FC)
[1]
다수의 위키를 포함한 많은 사이트에서는 7월 17일로 표기하였다. 하지만 상파울루 FC의 공식 홈페이지와 포르투갈어 위키 등에서 7월 7일로 표기하여 7월 7일로 기재하였다.
[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3]
상파울루 파와 히우지자네이루 파의 대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