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개항기부터 시작한 조선인 일본 유학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따라 시대별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 대부분 지주 및 상류층에서 이루어졌으며, 식민지가 된 국가를 되살리는 핵심 인물들이 되거나, 대부분 일제 치하에서 영화를 누렸다. 일제 유학의 양상이 크게 달라지는 분기점인 1930년대를 전후 한 일제의 식민지 유학 정책 및 유학생들의 실태에 대하여 다루고자 한다.2. 배경 및 역사
조선사회의 일본 유학은 개항 이후 18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1895년 갑오개혁을 통해 관비유학생의 형태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일반적인 조선 유학생들은 1900년대부터 확대되었다. 이 시기의 유학생들은 국가 중심적인 사상을 가지고 초기 근대 국가 형성을 위한 법, 정치, 경제학 등을 주로 전공하였고 조선의 근대적 변화의 주축이 되고자 하였다.1910년대 한일합병 이후 조선의 근대적 교육기관이 부족한 상황에서 고등교육을 받으려면 일본 유학이 유일한 선택지였고, 이에 따라 일본 유학생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지식인이 식민 통치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을 우려한 일제의 유학 억제 및 차별 정책이 있었고, 조선 통치를 수월하게 하기 위한 실업교육 위주의 교육정책을 펼쳤다.
1920년대에는 소극적 장려정책으로 바뀌었는데,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통치방침이 바뀌게 되며 본격적으로 유학이 확대되었다. 이 시기의 유학생 증가의 원인은 조선의 절대적인 교육시설 부재이다.
조선인의 고등교육에 대한 수요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연희, 보성전문학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등의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고, 3면 1교 정책과 같이 보통학교 또한 확충하였다. 그러나 이는 턱없이 부족한 수였으며 실질적인 재정지원이 낮았고, 열악한 조선의 교육상황에서 상급교육기관의 확충 은 매우 부족했다. 이는 조선의 높은 고등교육열과 맞물려 자연스럽게 일본으로 유학을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형성되었다.
일제의 내선동학 정책과 같은 동화 정책에 의거하여 조선인들의 유학 정책을 완화하며 본격적인 유학생 증가가 1920년대에 걸쳐 증가하였다. 그 결과 1930년대 내지일본과 조선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모습이 연출될 정도로 유학은 보편화되고 진학 코스의 하나로 선택되게 된다.
3. 특징
3.1. 대학
사립전문학교가 일반 대학으로 전환하며 학생 유치를 지속적으로 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관공립대학과 비교하여 7-8배 더 많은 인원이 사립대학을 선택하였다.관공립 대학은 지역적으로 전체 유학 인원의 절반정도가 도쿄에 몰려있으며, 그 다음은 교토, 나머지는 후쿠오카 미야기, 홋카이도 순으로 분포되어 있다. 주류인 도쿄와 교토 제대에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 미야기, 후쿠오카의 제국대학은 방계학생을 받는 제도를 채택하였으며, 그 결과 이 지역에도 많은 학생들이 유학을 가기 시작하였다
사립대학은 그나마 지역적 분포가 보이는 관공립 대학과 달리 대부분 도쿄에 편중되어있고,와세다(早稻田), 주오 (中央), 니혼(日本), 메이지(明治)대학 같은 사립대가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많은 정원과 다양한 전공 등의 이유가 있었으며, 그 뒤를 잇는 교토, 오사카는 조선인이 많이 사는 커뮤니티가 존재하였으며 많은 유학생들이 분포하게 되었다.
3.2. 전공
가장 인기있는 전공은 법, 정치, 상경 계열이었으며 법학은 1920-30년대를 거치며 꾸준하게 증하여 50퍼센트까지 향상되었다. 법학과는 고등고시를 도전하는 기회를 주었으며 상학은 전문직을 보장해주는 혜택이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모습을 보였다고 예측된다 문학은 이에 비하여 파동을 보이다 30년대에 들어와 비인기 학과가 되었다.이공학은 적은 분포를 보이며 대부분 고급 이론이 아닌 실무중심의 실습 교육을 받는 데 그쳤고, 이는 고등학력으로 이공학을 전공하기 어려웠던 조선 의 현실을 나타낸다. 그러나 1938년 국가 총동원 체제의 변화 이후 이공학 인력의 수요가 높아지며 분포가 늘어났다. 경성제대에 이공학부가 신설되는 등 공학 시설이 늘어나게 되었다.
4. 일제의 의도
일제의 교육정책은 고등교육을 통한 지식인 양성이 아닌 조선통치의 효율성을 위한 실업화 교육으로 교육시설 확충 및 재정지원이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반해 조선인의 교육열은 높아지는 반면 일본인 조선 재학생의 비율이 늘어났기 때문에 갈수록 조선인의 조선 내 재학 비율은 낮아지게 된다. 유학은 이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으며, 이에 맞추어 일본 내 대학의 조선 유학생에 대한 제도적으로 유연한 변화 및 인원 증가가 1930년대 유학 보편화의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5. 유학생들의 인식과 진로
시대에 따라 유학생들의 목적과 태도는 달라지게 되었다. 초기의 유학 형태는 근대화의 바람이 불고 있던 조선을 이끌어나갈 엘리트가 되기 위하여 국가적, 민족적이며 독립을 위한 적극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반면 1930년대에 들어서 대학에 진학하게 된 한일 병합 이후 태어난 세대는 대부분 1910년대 생으로 망국의 한 또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체감하기 힘들었다. 더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출세의 목적으로 유학을 많이 선택한 것으로 보여지고, 이는 유학 이후 취업하는 또래들의 사회 분위기와 더불어 1929년의 대공황이 영향을 미쳤다. 미래가 불확실한 불안한 현실 속에서 국가를 위하는 것 보다는 본인의 영달을 위하는 류의 유학생들이 다 수였다.
유학생들은 1930년대의 여러 전쟁이 발발하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새로운 사조와 방향성을 제시하는 주체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식인들이라고 불릴 만한 이들이 적은 상황 속에서, 유학생들은 조선사회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였으나 이는 개인에 머물렀고, 실천되기 어려운 상황을 마주하였다.
사회적으로 지식인들의 무기력함이 만연하였고, 취업난이 심해지는 배경 속에서 유학의 취지는 본인의 향학열 또는 자아실현을 위한 목적으로 바뀌었다. 또한 혼란스러운 사회에 나가기 싫었던 있는 집 자제들의 도피처이기도 하였다.
위와 같은 현실 속에서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국가보다는 본인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법학과의 지원률이 늘어났으며 일제의 엘리트관료로 출세하는 것이 조국에 헌신하는 것이라고 합리화하게 되었다. 제국의 관료들과 동문이 된다는 것은 일반 조선 사회와 비할 수 없는 지위를 얻는 것과 같았고, 국가 상실이라는 상황 하에서 순응하며 본인 스스로 샐러리맨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