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2 23:07:12

펠로폰네소스 동맹

스파르타 제국에서 넘어옴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의 동맹
델로스 동맹 펠로폰네소스 동맹 코린토스 동맹 아카이아 동맹 아이톨리아 동맹 보이오티아 동맹

펠로폰네소스 동맹
Σπαρτιατική Συμμαχία
Peloponnesian League
존속기간 기원전 6세기 ~ 기원전 4세기
정치 체제 군주정(스파르타)
국가 원수 스파르타 국왕
위치 그리스
성립 이전 스파르타
멸망 이후 마케도니아 왕국

1. 개요2. 역사
2.1. 초기2.2. 중기 이후2.3.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의 큰 변화와 자멸
3. 구성4. 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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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 유지된 고대 그리스 스파르타를 맹주로 하는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 도시국가들의 군사동맹이다.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과 맞붙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유명하다.

2. 역사

2.1. 초기

기원전 7세기 후반부에 이르면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정치력으로나 무력으로써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폴리스의 자리에 오른다. 이후 코린트 엘리스를 우방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스파르타는 팽창주의적인 대외정책과 강력한 군사력을 결합하여 개별적으로 여러 도시국가와 동맹을 체결해 나간다. 이후 기원전 530년 자신들의 패권에 강력히 저항하던 테게아까지도 꺾고 그들을 자신의 세력권 안으로 편입시키는데 성공하면서 기원전 500년에 이르면 아르고스를 제외한 전 펠로폰네소스 지역을 자신들의 헤게모니에 놓는데 성공한다.

2.2. 중기 이후

기원전 5세기 중반의 페르시아 전쟁이 벌어지자,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사실상 전 그리스의 도시국가를 하나로 모은 그리스 동맹에 가담하였다. 하지만 거의 50년에 걸친 전쟁 동안 아테네가 그리스 해군의 중심이 되었고, 펠로폰네소스 여러 도시 국가들은 육군의 중심이 되어 싸웠다. 불리한 전황을 이겨내고 마침내 페르시아 제국의 그리스 침공을 성공적으로 격퇴한 이후에도, 그리스 동맹군은 바다를 건너 원정을 떠나서 동부 지중해 페르시아 영역의 그리스계 도시들을 공략하여 해방하였으나, 전쟁의 확대를 원하지 않았던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도시 국가들은 곧 동맹을 탈퇴하고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재구성하였다. 이에 따라 남은 그리스 동맹은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으로 재편성되었다. 델로스 동맹은 이후에도 원정을 계속하였는데, 이로부터 확보된 해상 무역로는 아테네에게 막대한 수익을 안겨주었다.

강성해진 아테네는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들을 자신의 패권에 편입시켰고, 이러한 도시 국가들은 아테네의 민주정을 열성적으로 받아들였다. 끝을 모르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팽창은 과두정에 의해 유지되고 있던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의 여러 도시 국가들에 큰 위협이 되었다. 또한 스파르타의 아테네에 대한 노골적인 불안감은 반대로 아테네에게 스파르타에 대한 불신을 안겨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 세력 사이에 불신의 골이 깊어졌고, 계속된 긴장 끝에 마침내 기원전 460년, 아테네가 코린트와 메가라 사이의 전쟁에 개입하면서 15년간의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터졌다.

2.3.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의 큰 변화와 자멸

이후 10여 년간의 일시적인 평화기를 거쳐 기원전 431년, 코린트와 코르키아의 분쟁에 대한 양쪽 동맹도시들의 개입 시작으로, 본격적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였다.

30년 가까이 치러진 어 전쟁에서 보여준 스파르타의 모습은 대중의 상식과는 다르다.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초반에는 웃기게도 페르시아의 경보병 전술을 익힌 아테네에게 육상전에서 여러번 패배한다. 페르시아와 같은 경보병 전술은 잘 쓰기만 한다면 그리스의 중장보병 홉라이트에게도 유용한 것이었다. 아테네는 이오니아 지역에서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하면서 페르시아의 경보병 전술과 싸우며, 그들의 본토에서 장단점을 익혔다. [1] 아테네는 그리스 군대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페르시아 본토에서 싸우면서 익숙해진 하층민들을 활용하는 경보병 전술을 베껴서 사용하자, 스파르타 최정예 귀족 중장보병들은 아테네 경보병들의 기동 사격전술에 우르르 무너지고 사로잡혔다.

이렇게 육상전에서 스파르타의 허약한 모습은 현대인들에게도 당대인들에게도 당황스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실제로는 그다지 강력한 국가가 아니었다. 이렇게 스파르타가 약해진 원인은 그리스의 주요전술이었던 팔랑크스가 개개인의 전투능력보다는 그냥 물량빨로 상대를 짓밟아버리는 전투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즉, 스파르타는 그리스에서 대규모 병력징집이 적었던 페르시아 전쟁 이전의 시대에는 최강의 육군이 맞았지만, 페르시아 전쟁이후 대부분의 그리스 국가들이 스파르타의 방식으로 대규모 군대를 갖추면서 스파르타는 불과 몇십년만에 인구수를 빼면 그냥 귀족 전사 중심의 낡은 군대라고 볼 수 있었다.

반대로, 아테네는 국제적으로 침략 전쟁을 진출하면서 경제력의 상승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본토에서 여러번 싸워보면서 숙련된 병사와 장교급 시민들도 많았고, 기존의 스파르타가 여전히 '귀족 및 전사계급' 육성 전략에 만족하고 있을 동안, 해양제국으로 거듭난 델로스 동맹과 아테네 시민들은 약간 더 진화된 싸움방식과 무장시민 이외의 '하층민 계급과 경보병'을 이용하는 상식이 잠깐이지만 실제로 이루어졌다. 그에 비해서,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전쟁 이전까지이 명성과는 달리, 육상전에서 이러한 최신 전술과 더 많은 머릿수의 차이에도 무너질 정도로 '그냥 고전적이고 낡은 군대'였을뿐, 이 전쟁 초반의 스파르타는 더 선진적인 군사 계급이 발전하고 인구수도 많은 아테네의 육군에게 자주 깨지면서 그들의 민첩한 전투력을 배워올 수 밖에 없는 상태였다.

오히려, 재밌게도 스파르타는 이 전쟁에서 바다 위에서 아테네를 엿먹이면서 반격의 실마리를 잡았다. 물론, 전쟁 초반에는 스파르타는 가난한 내륙국가에 불과했고, 아테네의 강성했던 해군력 때문에 전략적으로 수세적인 국면에 몰렸다. 하지만, 전쟁 중기 이후에는 아테네가 너무 오만해지면서, 전쟁 초반의 스파르타가 그랬던 것처럼 외교적으로 오만하고 초보적인 실책을 반복하게 된다. 이렇데 아테네가 제국주의 분위기를 즐기며 동맹을 파탄 내는 동안, 스파르타는 오히려 귀족 군인들이 자존심을 버리면서 하층민 같은 경보병들을 대우해주고, 귀족들도 하층민처럼 가벼운 무장으로 무기를 개편하고, 페르시아와 손을 잡고 해군력을 기르면서 기존의 폐쇄적인 외교 전략을 정반대로 바꾸는 개혁을 단행했다.

결과적으로는, 육상전투에서도 그다지 확실하게 이기지 못한 스파르타였지만,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버린 아테네의 유아독존식 패권에 대한 델로스 동맹의 도시국가들의 불만이 터져나오면서, 그 기회를 틈타서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동맹과 중립국가들이 오만한 아테네를 배신하도록 유화적인 외교를 펼치면서 스파르타의 해군력으로 그리스 도시들을 복속했다. 즉,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의 낡은 육군 개념 때문에 육상전에서 승리하기는커녕 인구수가 많은 아테네를 상대할때 힘에 부치면서 싸웠고, 스파르타는 오히려 유화적인 외교 정책 수정 및 해군력 육성을 깨달으면서 승리한 전쟁이었다는 뜻이다. 뭔가 뒤바뀐 것 같지만 이게 실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역사이다. 육지에서 패배하고 바다와 국제외교를 깨달은 스파르타 vs 상업국가인데도 국제외교를 버릴 정도로 오만해진 아테네

결과적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 귀족들이 본인들의 정체성을 버릴 정도로 아테네의 해군 전략을 배우면서, 비슷한 전략을 사용하는 두 국가의 소모전이 되어버렸다. 이렇게되자, 거대제국 페르시아와의 적대 관계를 유지했던 아테네는 경제적인 자원 수급력에서 스파르타에게 밀리게 된다. 결국, 적국 페르시아의 지원이 없다는 약점을 지닌 아테네는 기원전 404년 굴욕적으로 스파르타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그리스의 패권을 빼앗아 왔지만, 스파르타 시스템 자체의 한계와 함께 오랜 전쟁이 그리스 전역을 폐허로 만들고 딱히 이득을 보지는 못 하였다.

최종적으로는, 이 전쟁은 승리했음에도 군사 국가였던 스파르타 왕정의 붕괴를 불러왔다.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는 아테네처럼 선진적인 세계관의 변화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음에도, 스파르타의 부실하고 낡은 귀족정의 한계와 그들의 헤게모니는 그리 오래가지는 못 했다.

기원전 395년부터 387년까지 벌어진 코린트 전쟁에서 스파르타는 무식한 국제 외교 때문에 동맹국들이 이탈하고, 페르시아의 지원을 등에 업은 아테네가 복귀하면서 제해권을 잃었다. 또한,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 전투에서는 전쟁의 피해를 회피하고 무난하게 인구수가 많았던 테베의 육군이 이미 시대에 뒤처진 스파르타 육군을 상당히 손쉽게 참패시켰다.[2] 결국,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사실상 이 전쟁이 어떻게 끝나던지, 스파르타의 후진적인 군사 위주의 정치 체제 때문에 스스로 멸망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이후 스파르타가 다시 동맹국을 모으면서 살아나려 했을 때,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왕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 전역을 아예 자신의 왕국, 마케도니아 왕국에 합병시켜 버렸다.

3. 구성

동맹국 간의 의사를 조정하기 위한 협의체가 존재했다. 인구 수, 경제력 등과 상관없이 가맹국들 모두 공평하게 한 명씩의 대변자를 파견했으며 동등하게 한 표를 행사했다. 타국 혹은 다른 동맹과의 충돌이 발발했을 경우,(즉 전시이면) 모든 회원국은 자신들이 보유한 병력의 1/3을 파견해야 할 의무를 지녔다.[3]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허울좋은 협의체인게, 이 협의체를 소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스파르타 뿐이었으며, 협의체의 의결 사항도 스파르타한테만큼은 강제력이 없었다.

실제로, 학자들 사이에서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동맹으로 보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이 꽤 많은데, 일단 이 동맹 자체가 스파르타에 의해 강제적으로 구성되었던 데다가 일부 동맹 구성국끼리만 자기들 사이의 또다른 동맹을 체결하는 것도 가능했던 등 여러모로 부실한 단합력 때문. 여기에 결정적으로 이 협의체보다는 스파르타의 민회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의사를 결정하는 실질적인 주체였다. 그냥 '스파르타와 아이들'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이다.

4. 이념

아테네와 대척점에 있던 동맹으로서 민주정에 반대했다. 다만 군주정에도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원한 것은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 적절하게 섞인 혼합정이였기 때문이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이러한 혼합정을 통해 평등한 시민의 정치 참여와 국가적 안정성을 모두 만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자세한 것은 스파르타 항목을 참조해보자.


[1] 애초에 페르시아 군대가 그리스 전사들에게 지속적으로 패배한 이유는, 페르시아 군대의 경보병 전술이 쓸모가 없는 방식이라서가 아닌 수뇌부의 전략적 오판과 고질적인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 때문이었다.) [2] 스파르타 육군이 테베 육군에게 패배한 이유는 전쟁이 이젠 머릿수를 위시한 덩어리 싸움과 개개인의 숙련도에 의존하던 단계에서 뛰어난 사령관의 지시 아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적절한 숙련도를 겸비한 병사들 체계로 넘어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레욱트라 전투 당시 스파르타군은 테베군보다 머릿수에서 우위에 있었고, 숙련도는 더 말할 것도 없었으나, 결국 에파미논다스라는 명장의 사선진에 의해 스파르타 진영이 모랄빵이 나서 패배한 전투이기 때문이다. 즉, 과거마냥 정직하게 덩어리 vs 덩어리로 부딫히며 개인의 무용을 과시하던 전장에서 뛰어난 장수의 지략에 의한 전략전술을 통한 승리 플랜이 필요한 단계로 넘어오고 있는 신호탄이 된 핵심적인 전투가 바로 레욱트라 전투였던 셈이다. [3] 대신에 이런 상황이면 평시에 의무적으로 내던 막대한 액수의 가맹금은 안 지불해도 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