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문서 : 스티브 유
1. 개관
박남정- 박진영- 유승준- 비로 이어지는 90년대 후반 대표 남성 솔로 댄스가수
한때 괴물같은 90년대 아이돌 속에서도 당당히 독보적인 인기를 자랑했었던 레전드급 가수[1]
한국 가요계에서 드문 존재인 남성 솔로 댄스 가수로서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큰 인기를 누렸다. 당장 상기한 가수 이후로 남성 솔로 댄스 가수로서 데뷔해 성공한 경우가 2010년대에 들어서는 없다. 혹자들의 평으로는 그의 갑작스러운 공백이 없었다면 비의 현재의 위치는 없었을 것이라는 가정이 존재할 정도로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1997년 4월 1일, 사랑해 누나라는 곡을 통해 데뷔했으며 이후 후속곡인 가위가 큰 히트를 기록하면서 단숨에 메이저 반열에 올라섰다. 가위춤은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가 따라췄고 곧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당시 90년대의 칼군무의 끝을 보여 줬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굉장히 현란했는데 지금봐도
1998년 출시한 2집 타이틀곡인 나나나, 내가 기다린 사랑 1999년 3집 열정[2], 1999년 4집 비전
스티브 유는 춤꾼 스타일의 옷을 입긴 했지만 안무 자체가 기본적으로 굉장히 격렬했고,[3] 또 대중성을 꽤나 의식했기 때문에 원타임이나 지누션 같은 당대의 동료 가수들과 비교해 보면 옷차림이 단정한 편이었다. 더불어 항상 미국식의 짧은 남자머리 (Buzz Cut) 혹은 반삭을 고수했기 때문에 중장년층 이상의 어른들에게도 큰 호감을 샀다.[4][5]
그리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도 슈퍼스타같이 우러러보는 위치가 아니라 나름대로 웃기고 재미있는 모습과 더불어 입담도 좋은 편이라서 옆집에 사는 동네 형같이 친근한 이미지도 있었고, 끼와 재주는 물론이고 탄탄한 춤실력과 격렬한 안무 속에서도 고음의 곡을 깔끔하게 소화해 내는 가창력까지 겸비했었다. 따라서 그는 그 때 활동하던 댄스 가수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이었고 발군의 재능을 뽐냈던 가수였다. 게다가 잘생긴 외모에다 탄탄한 근육질 몸매도 역시 그의 인기 요인 중 하나였다. 요즘에야 워낙에 몸이 좋은
또한, 예능 프로그램이나 각종 인터뷰를 통해서 데뷔 초기부터 성실하고 예의바른 모습을 보였던 터라 대외적인 그의 이미지 역시 상당히 좋았다. 더불어 출발 드림팀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면서 건강한 스포츠맨 이미지를 잘 쌓았다. 스타 서바이벌 동거동락에서는 멋있으면서도 마이크웍이나 입담도 좋아서 코믹한 동네 형같은 이미지도 잘 보여줬고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는 잘생긴 팀의 주장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면서 최후의 생존자가 되기도 하였다.
게다가 담배를 끊고 금연 홍보대사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좋은 이미지가 최고조에 달한 전성기 시절에는 아름다운 청년이라 불렸고,[6] 흔한 안티조차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의 대중적인 인기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광범위하였다. 그리고, 남학생들 사이에서도 "이야, 저 놈 잘생기고 춤도 잘 추고 진짜 멋있네? 학교 장기자랑 때 꼭 따라해야지." 정도의 위치까지 오른 상태였다. 심지어 댄스에 큰 관심이 없는 중장년층~노년층도 그의 대표곡과 얼굴 정도는 대부분 기억하며 호감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더하여, 나이도 어린 인기 연예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연애 스캔들도 없이 사생활도 무척 깨끗한 편이었고[7] 무대 뒤에서도 항상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던 터라 선후배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매우 좋았다. 요즘에 비해 이미지가 전반적으로 괜찮았던 개신교 신자였던 점을 여러모로 어필[8]한 점도 이에 한몫했다. MBC에서 아예 그의 데뷔 스토리와 데뷔 이후의 삶을 취재한 다큐멘터리까지 만들었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전성기 시절엔 대중적인 호감과 건전, 건강한 흠잡을 데 없이 좋은 이미지로 큰 인기를 얻었다.[9]
또한 2001년이 어찌보면 그에겐 인기 최전성기이자 가장 이익이 많았던 해인데 그 당시때 쟁쟁한 라이벌이었던 H.O.T.나 젝스키스같은 아이돌들이 이땐 대거 해체된 해였고 또한 이땐 그는 CF도 10편 이상 찍었고 또한 그당시 잘나가던 음반회사와 37억 원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를 가진 돈을 받고 계약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스티브 유에겐 엄청난 최고의 한해였다 보면 된다.
그러나 전성기 시절에도 가수로서의 커리어가 생각보다는 압도적이지 않다. 음반 측면에서 비슷한 시대에 활동하며 누적 판매량 450만~800만가량을 기록한 조성모, H.O.T., god에게 큰 차이로 밀리며 가요제 수상 면에서도 대상 기록이 있는 위 가수들에 비해 스티브 유는 대상 기록이 없다. 물론 그가 대상을 못 탔다고 해서 딱히 논란이 있던 것도 아니다. 또한 3집에서 커리어하이를 찍은 이후로 하향세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는데, 82만 장도 이름값에 비해서는 꽤 낮은 편이다. 아이돌 가수나 발라드 가수에 비해 음반에서 불리한 댄스 가수로서의 태생적인 한계라고 보기엔 별다른 팬덤이 있지도 않았던 터보에게도 판매량이 밀리고 리즈 시절에 평균 50만 장 정도를 팔았던 김현정을 아주 크게 앞서지도 않는다.
음판이 아닌 인기도 측면에서 봐도 리스피아르 조사연구소에서 제공하는 자료를 살펴보면 당시 설문조사 자료의 순위에서도 조성모, H.O.T., 스티브 유가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연령대를 아우르는 점을 강조하지만 그런 측면에서는 조성모도 비슷하다. 10대 가수 가요제에서의 30대 이상이 뽑은 가수 명단에 들어간 횟수도 조성모가 앞서고, 위의 리스피아르 설문조사도 모든 연령층을 대상으로한 설문조사 결과이다.
하지만, 그의 인기의 특징을 꼽자면 스티브 유는 호불호 없이 누구나 좋아했던 가수라는 점이다. 스티브 유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 1위는 아니였을지언정, 싫어하는 사람없이 누구나 다 크고작은 호감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H.O.T.라고 대답한 사람에게 "스티브 유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당연히 좋다. 잘생겼다. 멋있다."라는 답이 오는 분위기였다. 누구나 좋아하지만 최애캐 정도는 아니었기에, 사회 전체적으로는 엄청난 인지도와 인기를 보유한 것처럼 보였지만 개인의 음반판매량등은 동시기 라이벌들에게 밀렸던 것이라 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그의 입지도는 지금으로 치자면 유재석의 대중적인 이미지 + 권상우의 건강한 이미지 + 송중기의 건전한 이미지 정도였다고 보면 된다. 또한, 그가 만약 지금까지 연예계에 살아있었다면 지금쯤은 적어도 음악과 예능, 지금하는 배우활동까지 한국에서 했다면 멀티 엔터테이너로써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한 순수 청년 이승기의 자리를 건강한 청년으로써 먼저 선배로서 차지했거나, 더 나아가면 거의 유느님 자리까지 탐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인기가 굉장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 그는 지금에 속히 말하는 엄친아로 통했었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그는 대한민국의 남성이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짓거리를 저질러버리는 바람에 한때 "전국민에게 호감을 받고 사랑받던 가수"에서 지금은 "전국민이 가장 미워하고 증오하는 가수"로 변해버린다.
2. 음반 목록
발매일 | 제목 | 판매량 | 싱글 |
1997.03.00 | West Side | 60만여 장 | 가위, 사랑해 누나 |
1998.05.01 | For Sale | 798,296장 | 나나나, 내가 기다린 사랑 |
1999.04.16 | Nor or Never | 825,569장 | 열정, 슬픈 침묵 |
1999.12.10 | Over and Over[10] | 530,674장 | 비전, 연가 |
2000.11.11 | 고지탈환 | 418,208장 | 찾길 바래, 어제 오늘 그리고... |
2001.09.00 | Infinity | 244,684장 | Wow, 성원 |
2007.09.18 | Rebirth of YSJ | 3만여장 | My World |
- 컴필레이션, 라이브
발매일 | 제목 |
1998.08.21 | 98 Live Album |
1999.08.00 | New Release + English Version |
1999.09.01 | All that Yoo Seung Joon |
2000.06.00 | Gold Techno Remix |
2001.01.01 | Hidden Story |
2001.09.01 | Best & J Duet Collection |
2002.01.14 | 2002 Live |
3. 공중파 1위 기록
연도 | 수상내역 | |
1997년 | * 가위 8월 9일 MBC 《인기가요베스트50》 1위 | |
8월 16일 MBC 《인기가요베스트50》 1위 (2주 연속 1위) | ||
8월 17일 SBS 《TV가요20》 1위 | ||
8월 20일 KBS 《가요톱텐》 1위 | ||
8월 24일 SBS 《TV가요20》 1위 | ||
8월 27일 KBS 《가요톱텐》 1위 | ||
8월 31일 SBS 《TV가요20》 1위 (3주 연속 1위) | ||
9월 3일 KBS 《가요톱텐》 1위 (3주 연속 1위) | ||
1998년 | * 나나나 6월 7일 SBS 《인기가요》 1위 | |
6월 14일 SBS 《인기가요》 1위 | ||
6월 16일 KBS 《뮤직뱅크》 1위 | ||
6월 21일 SBS 《인기가요》 1위 | ||
6월 25일 KBS 《뮤직뱅크》 1위 | ||
6월 28일 SBS 《인기가요》 1위 (4주 연속 1위) | ||
6월 30일 KBS 《뮤직뱅크》 1위 (3주 연속 1위) | ||
1999년 | * 열정 4월 13일 KBS 《뮤직뱅크》 1위 | |
4월 20일 KBS 《뮤직뱅크》 1위 | ||
4월 27일 KBS 《뮤직뱅크》 1위 | ||
5월 4일 KBS 《뮤직뱅크》 1위 | ||
5월 9일 SBS 《인기가요》 1위 | ||
5월 11일 KBS 《뮤직뱅크》 1위 | ||
5월 16일 SBS 《인기가요》 1위 | ||
5월 18일 KBS 《뮤직뱅크》 1위 (6주 연속 1위) | ||
5월 30일 SBS 《인기가요》 1위 (트리플 크라운) | ||
* 슬픈 침묵 7월 6일 KBS 《뮤직뱅크》 1위 | ||
7월 11일 SBS 《인기가요》 1위 | ||
* 비전 12월 14일 KBS 《뮤직뱅크》 1위 | ||
12월 19일 SBS 《인기가요》 1위 | ||
12월 21일 KBS 《뮤직뱅크》 1위 | ||
12월 26일 SBS 《인기가요》 1위 | ||
2000년 | * 비전 1월 2일 SBS 《인기가요》 1위 (트리플 크라운) | |
1월 4일 KBS 《뮤직뱅크》 1위 | ||
1월 11일 KBS 《뮤직뱅크》 1위 | ||
1월 18일 KBS 《뮤직뱅크》 1위 (5주 연속 1위) | ||
* 연가 2월 13일 SBS 《인기가요》 1위 | ||
2월 20일 SBS 《인기가요》 1위 (2주 연속 1위) | ||
* 찾길 바래 12월 21일 KBS 《뮤직뱅크》 1위 | ||
12월 23일 MBC 《음악캠프》 1위 | ||
12월 24일 SBS 《인기가요》 1위 | ||
12월 28일 KBS 《뮤직뱅크》 1위 | ||
2001년 | * 찾길 바래 1월 4일 KBS 《뮤직뱅크》 1위 (3주 연속 1위) | |
1월 6일 MBC 《음악캠프》 1위 | ||
1월 7일 SBS 《인기가요》 1위 | ||
1월 13일 MBC 《음악캠프》 1위 (3주 연속, King of the Camp) | ||
1월 14일 SBS 《인기가요》 1위 (트리플 크라운) | ||
* Wow 10월 7일 SBS 《인기가요》 1위 | ||
10월 14일 SBS 《인기가요》 1위 | ||
10월 21일 SBS 《인기가요》 1위 (트리플 크라운) |
[1]
실제로 그 당시
H.O.T.나
젝스키스 같은 아이돌들이 엄청나게 인기가 많았던 시기라 그런지 솔로가수들 중에서는 인기많은 인물이 많이 없었지만 스티브 유만이 거의 드물게 댄스 가수로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었다.
[2]
40초 부근에 스타크래프트
마린의 gogogo도 살짝 나오는 등 유행을 굉장히 잘 탔다.
[3]
실제로 스티브 유는 그 당시 연예계에 다섯 손가락에 손꼽히는 춤꾼이기도 했다.
[4]
그 당시에는 머리를 길게 하는 게 유행이어서 지저분해보이고 그래서 당연히 두발에 대한 제한을 두었지만 스티브 유 같은 경우에는 머리도 짧은 데다 깔끔하고 깨끗한 데다 얼굴은 물론 두상까지 예뻤기 때문에 굉장히 잘 어울렸고 유행도 순식간에 뒤바뀌기도 했다.
[5]
당시 중고교 두발 규정이 빡빡했던 터라 학생부와 학생간 두발단속문제도 꽤 심했지만 스티브 유의 반삭머리가 남학생들에게 유행을 타면서 알아서 단정한(...) 머리를 만드니 이때만큼 학생부가 두발 단속에 별 신경 안 쓴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6]
1집 활동 당시 방영되었던
KBS 2TV 슈퍼 선데이의 '아름다운 청년 유승준'이라는 제목의 코너에서 비롯된 칭호이다. 물론 뒤에 후술할 일련의 사건 이후로는 무의미해진 칭호...
[7]
현재 아내인 크리스티나 오(한국명 오유선)와 무려 그가 데뷔하기 7년 전인 1990년도부터 사귀고 있었고 그가 국내 활동 공백기 동안에는 영주권 유지를 위해 미국에 머물렀던 덕이 큰 것으로 보인다.
[8]
당시에도
반기독교 정서는 물론 있었으나, 전국민적인 단위로 개신교에 대한 감정이 나빠진 것은 200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었다.
한국의 개신교 문서 참고. 앨범 마지막 곡은 항상 손수 부른
찬송가 중 하나가 차지했는데, 어째서인지 CD나 테이프에 곡 이름이 빠져 있어서 끝까지 듣던 사람들이 다 끝난 줄 알고 끄려다가 당황하는 일도 있었다.
[9]
다만, 당대에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와 관련된 잡음이나 루머가 존재하긴 했는데 그가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갱단 출신이라는 루머였다. '코리안 프라이드'라는 갱 조직으로서 1992년 초반에 결성되었고 1990년대 중반 전성기였으나 이후 더 거대한 세력의 아시안 프라이드에 흡수되었다. 하지만, 그가 갱단 소속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 동네는 갱단 들어가면 탈퇴 못한다.
[10]
4집이며 당시로서는 매우 쇼킹하게도 서울시내버스 일부 노선에 외부 광고를 게재하였다. 스티브 유의 진정한
리즈 시절임을 감안한 소속사의 마케팅이다. 물론 2010년대에는 음반 광고가 꽤 자주 나오지만 90년대 말에는 아주 쇼킹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