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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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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송가수.jpg
중국 동맹회원
본명 한교준(韓教准)
한문 宋嘉樹
한국식 독음 송가수
영문 Sòng Jiāshù
영어이름 Charlie Soong, Charles Jones Soong
요여(耀如)
출생 1863년 2월 17일
청나라 광동성 문창현
(現 중화인민공화국 하이난성 원창시)
사망 1918년 5월 4일 (향년 55세)
중화민국 상하이
(現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가족 장녀 쑹아이링
차녀 쑹칭링
3녀 쑹메이링
장남 쑹쯔원
학력 트리니티 칼리지 혹은 밴더빌트 대학교 졸업
직업 기업인, 정치가

1. 개요2. 생애
2.1. 미국으로 가다2.2. 금의환향2.3. 가정을 꾸리다2.4. 상하이의 거물 혁명가2.5. 쑨원과의 악연2.6. 사망
3.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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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말민초의 기업인, 정치인. 쑹아이링, 쑹칭링, 쑹메이링, 쑹쯔원 남매의 아버지로 유명하다.

2. 생애

2.1. 미국으로 가다

1863년, 현재의 하이난성에 속하는 청나라 광동성 해남도 문창현 주진 고로원촌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한교준으로 빈농인 한홍익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홍익의 집이 너무 가난하였기 때문에 한홍익은 동생 한금이에게 한교준을 양자로 보냈지만 한금이 역시 한교준을 먹일 능력이 없어서 부인 송씨의 친척들이 사는 매사추세츠 보스턴으로 보내서 그곳에서 가게 심부름꾼을 시키기로 결정했다. 1875년, 12세의 한교준은 해남도 청란항에서 배를 타고 미국을 떠나게 되었는데 한교준은 미국에서 신식교육을 받기를 기대했지만 기대와 달리 허구한 날 두들겨맞는 허드렛일꾼 신세가 될 뿐이었다. 한교준은 이에 불만을 품고 1877년에 가출하여 미국 국세청 소속의 선박 앨버트 갤러틴 호에 밀항하였다.

한교준은 화장실에 숨어서 한동안 숨어 있었지만 얼마 안가 선원들에게 잡혀서 선장인 에릭 가브리엘슨 앞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중국인 꼬마가 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브리엘슨 선장은 한교준에게 이제 선원들의 법도대로 바다에 던져 상어밥으로 주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한교준은 조금도 겁을 먹지 않고 그러면 상어들은 배를 채우겠지만 당신의 구두를 닦아줄 사람이 없어서 당신의 손만 힘들어질 것이라고 대꾸했다. 가브리엘슨 선장은 한교준이 또래 아이들답지 않게 재치 있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찰스 손'라는 이름을 지어주고[1] 정식으로 선원으로 고용했는데 당시 쑹자수의 나이가 14세에 불과했으므로 선원으로 고용될 수 있는 나이인 16세가 된 1879년 1월 8일에야 법적으로 신고했다. 찰스 손이 된 한교준은 처음에는 보스턴 항에 정박했을 때 자신을 쫓아낼까봐 두려워 숨는 소동을 벌이곤 했으나 정식 선원이 되면서 마음놓고 일할 수 있게 되었고 훌륭한 일솜씨로 인하여 선원들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정식 선원으로 등록된 후에 변발도 밀어버렸다고 한다.

2.2. 금의환향

가브리엘슨 선장은 찰스 손이 신식교육을 받기를 희망한다는 것을 알고 서양의 역사, 지리, 고전, 기독교 교리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그러다가 찰스 손은 상해사람 온병충과 우상주를 알게 되었는데 예일 대학교를 졸업한 이 두 사람은 청나라 청년들의 미국 유학을 주선하는 사업을 벌이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찰스 손에게 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유했다. 가브리엘슨 선장도 찬성하여 찰스 손을 지지하려 했지만 1880년 1월, 보스턴에서 노스캐롤라이나 워밍턴으로 전근을 가게 되면서 찰스 손은 후원자를 잃고 막막한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가브리엘슨 선장이 미군의 로저 무어 대령에게 찰스 손을 소개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1880년 11월 7일, 찰스 손은 정식으로 기독교 세례를 받고 인쇄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어 찰스 손에게 세례를 준 리카우드 목사가 트리니티 칼리지(현 듀크 대학교) 학장 블랙스톤 크레이븐 박사에게 찰스 손의 입학을 부탁하여 승낙을 받았다. 리카우드 목사는 또한 노스캐롤라이나의 부호인 줄리앙 카에게 찰스 손의 학비와 생활비를 후원해줄 것을 요청하여 이 역시 승낙을 얻었다. 1881년 3월, 찰스 손은 정식으로 카 부부를 만나 인사를 드린 후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찰스 손의 영어실력이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예비생으로 등록되어 읽기, 쓰기, 산술을 배우게 되었다. 찰스 손은 영어 실력이 완벽해지면서 자신의 이름을 정식으로 찰리 쑹으로 고쳤고 3년 후, 뛰어난 성적으로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2] 당시 대학 학장이었던 맥타이어 주교와의 논의 끝에 찰리 쑹은 1886년, 중국에서 선교사업을 하기 위해 귀국하였다.

2.3. 가정을 꾸리다

찰리 쑹은 월급 15달러를 받고 상해 오송구의 전도사로 일하게 되었는데 만국공보의 발행인이자 그의 상관인 알렌 목사는 그를 그저 포부가 큰 농부 정도로 우습게 보고 차별대우를 하였다. 알렌이 주는 월급이 너무 적었던 관계로 본 교회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이때 그가 가르친 학생 중 한명이 후스였다. 찰리 쑹의 강의는 인기를 얻어 곧 학생 수가 2배로 늘게 되었으나 자신에게 상해말을 가르쳐주던 선교사 찰리 마샬과 대판 싸우고[3] 곤산의 순회 선교사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식 옷차림과 생활이 몸에 배어 있던 그는 농민들에게 이방인으로 백안시당해서 한동안 외로운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던 중 미국에서 그에게 학문을 권했던 우상주와 재회하게 되었는데 우상주는 처제인 성공회 신자 예계진을 소개시켜주었다. 마침 온병충도 예계진의 언니와 결혼한 상태였고 온병충과 우상주는 찰리 쑹을 예씨 집안에 정식으로 소개해주었고 1887년, 찰리 쑹은 예계진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한동안 찰리 쑹은 조용한 목회자의 삶을 사는 듯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상해의 청방 및 홍방 조직원들과 접촉하며 차차 혁명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88년, 정식으로 목사가 된 찰리 쑹은 1889년 상해 지구로 전근을 가게 되었으며 1890년 순회포교를 그만두고 상해 교외 천사 지구의 선교사가 되었다. 이 무렵 찰리 쑹은 미국성서협회의 상해 대리인 자격으로 미국의 종교 서적을 싼값에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2.4. 상하이의 거물 혁명가

찰리 쑹은 사업을 위해 한동안 아이를 낳지 않다가 1890년에 첫 딸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쑹아이링이다. 찰리 쑹은 자신의 학업을 후원한 카 부부를 기리기 위해 낸시 카의 이름을 따서 쑹아이링의 세례명을 낸시로 정했다. 이후 쑹씨 가문의 사업은 날로 융성해졌고 1893년 쑹칭링을 낳고 리카우드 목사의 딸 로자먼드 리카우드의 이름을 따서 로자먼드로 세례명을 지어주었다. 우상주와 온병충이 찰리 쑹의 사업에 자금을 지원해주었고 홍방 조직원들도 투자금을 제공함에 따라 찰리 쑹의 사업은 날로 커져 프랑스 조계지 안에 집을 구입하고 인쇄기를 설치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찰리 쑹은 미국의 카 부부와의 연줄을 이용하여 미국의 신식 중기계들을 도입하는 브로커 역할도 하여서 상하이의 민족자본가들과 미국 재계를 이어주었고 그 대가로 역시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름없는 목회자에 불과했던 찰리 쑹은 1893~1894년 즈음이 되면 상하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이 되었다. 1894년, 찰리 쑹은 장남 쑹쯔원을 낳았고 1897년에는 막내딸 쑹메이링을 낳았다. 이어 쑹쯔량, 쑹쯔안 형제를 잇달아 낳았다.

한편 찰리 쑹은 1892년, 광저우에서 기독교청년회 문제로 쑨원과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중국의 미래에 관해 열띤 토론을 하였고 찰리 쑹은 위험을 무릅쓰고 쑨원의 혁명활동을 돕기 시작했다. 그는 쑨원의 혁명활동의 후원자이며 비서, 조직가로 활동했고 심지어 쑨원의 불온 출판물을 몰래 인쇄해서 배포해주기도 했다. 1894년, 쑨원이 입헌제 개혁 청원이 실패하자 하와이로 건너가 흥중회를 조직했는데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청나라가 패배하자 쑹자수는 쑨원의 귀국 청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쑨원은 상하이에 체류할 때마다 늘 찰리 쑹의 집에서 지냈으며 찰리 쑹의 자녀들도 쑨원을 집안 삼촌 정도로 보며 따르게 되었다.

반만 민족주의 사상과 서양에서 배운 경험이 풍부했던 찰리 쑹은 자녀들에 대해 획기적인 교육관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딸들은 감리교파에서 만든 상하이 한커우로 중서여학교로 진학했다. 찰리 쑹은 자식들이 넓은 세계를 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1903년, 쑹아이링을 웨슬리언 대학교로 유학을 보내주었다. 쑹아이링은 높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1907년 귀국하여 쑨원의 영문 비서가 되었다. 그해에 쑹칭링과 쑹메이링을 미국에 유학보냈다. 찰리 쑹은 상하이 사교계의 명사 중의 명사로 하비로에 있는 그의 저택에는 상하이의 저명인사들이 자주 방문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 발생 후 위안스카이가 총통이 되어 독재를 휘두르자 쑹자수는 1913년 계축전쟁에 참가하여 위안스카이 타도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쑨원, 장녀 쑹아이링과 함께 도쿄로 망명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쑹아이링은 쑨원의 영문 비서가 되었는데 윌리엄 헨리 도널드의 회고에 따르면, 쑨원이 미국 시찰 여행을 떠났을 때 쑨원은 기차 안에서 쑹아이링에게서 단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고 한다.

2.5. 쑨원과의 악연

결국 쑨원은 쑹아이링에게 홀딱 반해서 찰리 쑹에게 쑹아이링과 결혼하게 해달라고 했다. 찰리 쑹은 이미 그녀와 비슷한 나이 뻘의 아들 쑨커[4]를 두고 있는데다가 아내가 이미 있는 쑨원에게 중혼은 절대 허락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결국 쑹아이링은 쑨원의 비서를 그만둔 후 1914년, 산서성 출신의 사업가이며 YMCA 일본 간사였던 쿵샹시와 결혼하였다. 그러자 새롭게 쑨원의 비서가 된 것은 그전부터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쑨원과 찰리 쑹의 뒷바라지를 하던 쑹칭링이었는데 1915년, 쑨원이 이번에는 쑹칭링에게 반해서 청혼하였다. 쑹칭링 역시 쑨원과 결혼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50살이나 되었는데다가 아내까지 있는 쑨원이 자신의 금쪽같은 22살 딸과 결혼하겠다고 나서는 데에 찰리 쑹은 당연히 발칵 뒤집혔다. 찰리 쑹은 쑹칭링을 방에 가둬버렸지만 쑹칭링은 기어이 창문을 넘어 달아나 쑨원이 있는 고베로 달아나버렸다. 격노한 찰리 쑹은 일본까지 쫓아가 일본 정부에게 이 결혼을 막아달라고 청원했지만 요쿄하마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쑨원이 10월 25일에 쑹칭링과 결혼식을 올린 후였다. 찰리 쑹은 쑨원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당신, 당신이 담도 크게 감히 내 딸을 속이고, 우리의 우정을 배반하는 행위를 한 것은 우둔하기 짝이 없네. 우리가 함께 분투하던 지난 20년을 잊어서는 안되네.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지금 도리어 의지를 상실하고, 천지가 고통스러워하고 원수가 통쾌하게 여기는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쑹칭링이 쑨원을 두둔하며 용서를 청하였지만 찰리 쑹은 매몰차게 결혼이 무효라고 선언하였다.[5] 하지만 쑹칭링이 계속 쑨원을 옹호하자 결국 쑹칭링에게 의절을 선언하고 상하이로 돌아왔다. 이 충격으로 찰리 쑹은 급격히 노쇠하였다.

2.6. 사망

1917년, 예계진이 몸져눕게 되자 찰리 쑹은 쑹메이링을 중국으로 도로 불러들였다. 찰리 쑹은 감리교회에서 일하는 젊은이 주자청을 셋째 사위로 점찍고 그를 쑹메이링과 만나게 했다. 이때 쑹메이링은 이미 자신이 미국에서 사귀던 연인이 있었다고 밝혀 아버지를 놀라게 했지만 주자청과 만나라는 지시를 순순히 따랐다. 하지만 이듬해인 1918년에 이르러 위암에 걸린 찰리 쑹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그 소식을 들은 줄리앙 카를 비롯한 미국의 지인들이 마지막으로 찰리 쑹을 만나기 위해 1918년 5월 3일, 방문하였다. 쑹칭링도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찾아왔는데 찰리 쑹은 그런 딸을 둔 적이 없다고 성을 내면서 쫓아내라고 했지만 줄리앙 카가 마지막으로 딸을 한번 만나라고 간곡히 부탁하자 쑹칭링과 만났고 결국에는 딸을 용서하였다. 이후 쑹씨 일가들은 마지막으로 가족사진을 촬영했다.

줄리앙 카가 미국에서 암에 효과가 좋다고 밝혀진 신약을 구입해서 왔지만 이미 암이 많이 진행된 찰리 쑹은 5월 3일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이때 예게진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안될 것 같소. 지금부터의 길은 아직도 매우 길다오. 나는 당신과 애들에게 미안하오. 쯔량, 쯔안은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으니 당신이 애써 키워야 되겠소. 인재가 되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소원이지만 안된다 해도 억지로 하지 마오. 쯔원은 미국에서 배우고 있으니까 자주 편지를 보내 문안해주시오. 그는 희망이 있는 애요. 나머지 세 자매 중 결혼하지 못한 것은 메이링 뿐이오. 메이링은 당연히 사회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 되오. 그애는 자질이 총명하기 때문에 친구를 선택할 때도 신중히 하기 바라오. 아이링은 큰언니로써 많이 힘써야 하고."

그가 사망하고 50년이 지난 후,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불어닥치자 장칭 쑹칭링을 미워하여 그의 아버지인 쑹자수를 반동 매판 부르주아로 공격하면서 홍위병들에게 그의 무덤을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3. 참고문헌

  • 송미령 평전, 진정일, 한울.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송경령 연구, 이양자, 일조각.
  • 손문평전, 해롤드 시프린, 지식산업사.

[1] 교준의 발음이 차오순인데 이게 찰스 손으로 들렸다고 한다. [2] 이상 송미령 평전의 기록, 송경령 연구에 따르면 밴더빌트 대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3] 찰리 마샬은 원래 중국인으로 감리교 선교사 캐리의 심부름꾼으로 14년간 미국에서 살면서 영어를 배운 인물이었는데 대학교육을 받은 찰리 쑹보다 영어 실력이 나빠서 찰리 쑹이 곧잘 지적하곤 했고 이 때문에 열받아서 싸우게 되었다고 한다. [4] 쑹아이링이 1889년생, 쑹칭링이 1893년생, 쑨커가 1895년생이며 쑹메이링은 1897년생으로, 쑨커는 이미 20살의 장성한 청년이었다. [5] 그럼에도 이날 쑨원이 모습을 드러내어 자신과 만나자, 쑹자수는 3번이나 절을 하며 "철없는 내 딸을 잘 부탁한다"고 말한 후 떠났다. 이 당시 쑨원이 머무르고 있던 집의 주인인 우메야 쇼키치의 딸이 이 광경을 목격했는데 그녀는 훗날 이 일에 대해 '사위가 장인에게 절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장인이 사위에게 절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중국인은 참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는 소회를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