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11 22:39:23

성낙중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파일:성낙중.jpg
성명 성낙중(成樂衆)
본관 창녕 성씨
생몰 1895년 3월 17일 ~ 1919년 3월 31일
출생지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사암리
사망지 경기도 용인군 외서면 백암리
매장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 행군이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성낙중은 1895년 3월 17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사암리에서 부친 성문영(成文永)과 모친 신창 맹씨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대한제국 수륜원(水輪院) 주사를 역임했으며, 집안은 넉넉한 편으로 집이 수십 칸 되었고 고염을 서너가마 주울 정도로 보유한 농지가 넓었다고 한다. 성낙중은 준수하고 건장하며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하루는 증조부가 한겨울임에도 새뱅이(민물 새우)가 먹고 싶다고 하자, 그는 마을 웅덩이에 가서 얼음을 깨고 얼개미로 잡아 매운탕을 끓여 드렸다고 한다.

성낙중은 1912년 양지은사수산장(陽智恩賜授産場)에서 발행한 잠업과정을 수료했고, 이근행과 결혼해 아들 성대경을 낳았으며 1919년 3월 무렵인 딸의 출산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던 1919년 3월 31일, 성낙중은 용인군 외서면 백암리에서 발발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해 3천 명의 군중과 함께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를 공격했다. 이에 헌병대가 발포를 가하자 많은 이들이 피살되었는데, 그 중엔 성낙중도 있었다.

부인 이근행은 남편을 잃은 뒤 딸 성숙경을 낳은 후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친정이 있는 이천 장호원 방추리로 향했다. 그녀는 친정 식구들로부터 재가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끝내 거부하고 자식들을 혼자 힘으로 키웠다고 한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성낙중의 손자 성기홍 씨는 한국방송공사의 성재호 PD로부터 2013년에 우연히 발견된 3·1운동 시 피살자 630명 명단’에 조부의 이름이 들어있다는 소식을 들었다.[1] 이후 그는 조부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고자 노력했고, 결국 국가보훈처는 2016년 성낙중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당시 그 명단엔 ‘성낙성(成樂星)’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