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23:21:29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선한 사마리아인에서 넘어옴
1. 개요2. 원문( 공동번역성경)3. 해설4. 인용

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an_Wijnants_-_Parable_of_the_Good_Samaritan.jpg

성경 루카 복음서 10장 25절에서 37절까지 등장하는 이야기.

2. 원문( 공동번역성경)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하고 반문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놓고 갔다.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의 복음서 10장 25~37절

3. 해설

예수가 가르침을 펼치고 있는데 어느 유대인 율법학자가 딴지를 건다. 그 내용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이웃을 사랑하라 했는데 이웃이 과연 누구냐?"는 것이다. 이에 예수는 일화를 들어 설명한다. 성경에는 이 율법학자가 스스로 옳아보이려고 이 질문을 했다고 전한다.

어느 유대인 상인이 예리코로 가는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 두들겨 맞아 초주검이 되어 맨몸으로 길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사제[1]가 길을 가다 이를 보고는 피해서 가 버렸다. 뒤따라 레위인[2]이 지나갔으나 역시 무시하고 지나가 버렸다.[3] 반면 유대인들이 멸시해 마지않던 사마리아인[4]은, 길바닥의 상인을 보자 응급처치를 하고 여관으로 가서 간호한 후 떠나기 전 돈을 내며 다친 유대인 상인을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한다. 심지어 비용이 더 들면 자신이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 하기까지 했다.

예수가 이 셋 중 누가 강도 만난 상인의 이웃이냐 묻자 율법학자는 차마 사마리아인을 입에 올리지 못하고 자비를 베푼 이라고 대답한다.[5] 이에 예수"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고 답한다.

예수의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이해하려면 우선적으로 사마리아인들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사마리아는 아시리아에 의해 북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 후 잔존한 이스라엘인의 후예로, 이들은 솔로몬 왕의 자식들 사이의 분쟁으로 이스라엘 왕국이 북 이스라엘 왕국과 남 유대 왕국으로 분단되어 대립한 이후 예루살렘 성전을 부정하는 독자적인 모세오경과 교리를 내세우며 유대 왕국의 유대교로부터 신앙적으로 분리되었다. 당연히 유대인들에게는 이교숭배자들과의 타락한 혼혈로 불리며 멸시당했다.[6] 그러나 예수 사마리아인도 진정으로 자비를 베푸는 자는 이웃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이웃이란 신앙이 이단이냐 아니냐에 따라 결정되느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뜻을 행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며, 어려운 이들을 돕고 사랑하는 자들이란 것이다. 세상에는 악한 유대인이 있을수도 있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있을수도 있는 것이다.

비유에서 부정적으로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게 된다는 율법조문을 지키기 위하여 하느님의 뜻, 즉 사랑을 실행하지 못하였으므로 진정한 이웃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은 루카의 복음서 8장 22절에서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있다는 말에 "내 어머니와 동생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대답한 것에서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 예수, 하버드에 오다>라는 책에 의하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인물들은 랍비들의 예화에 나오는 단골인물들이다. 예수의 예화가 다른 점은, 마지막에 보통 이스라엘 사람[7] 대신에 사마리아인이 온다는 것. 우리나라 식으로 치면 양반과 선비, 농부 대신에 양반과 선비 그리고 여진족이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후술되어 있듯이, 사제나 레위인은 사제 계급으로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지게 되지만 이들의 행동은 종교법상으로는 다시 정화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만 좀 걸릴 뿐 아무런 문제는 없다. 또한 보통 깔끔을 떨거나 율법을 방패로 선한 일을 하지 않는 역할이라서 예화에서 이들이 보인 행동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준. 이야기의 포인트는 마지막에 보통 이스라엘 사람 대신 사마리아인이 나온다는 것이다. 즉, 이 이야기의 논점은 "누가 이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과 함께 보통 이스라엘 사람들도 사제 계급과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마리아인들이 더 낫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또한 예수의 시대에는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는 길은 꼬불꼬불하고 거칠며 강도가 들끓기로 악명이 높았다. 거기다 전술했듯이 사제나 레위인같은 유대인 사제 계급은 시체같은 부정한 것을 만지면 그 날로 부정해지므로, 다친 사람을 잘못 만지다가 죽거나 하면 자신들이 크게 곤란해졌을 것이다. 이 때문에 성서고고학자 김성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 예수가 뭘 잘 몰랐다"라는 느낌의 디스를 시전했으나, 이에는 반론이 존재한다. 원래 유대인 안식일에 일을 하면 안됐지만 예수는 이를 부정하면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도 했고,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먹게 하는 일을 하거나 병든 자를 고치고 그 자리를 들고 가라 하는 등 일부러 안식일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을 해 왔는데, 그것 자체가 안식일을 범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잘못된 인식을 정면으로 들이받은 것이다. 이들은 인간을 조건 없는 사랑으로 선택하고 은혜를 내려준 야훼를 사랑하는 마음을 되새기고 그를 섬기며 보내라는 뜻으로 세상적인 ‘일을 하지 말고 쉬라’ 는 안식일의 참된 의의를 망각한 채, ‘일을 하지 말라’ 라는 말을 지나치게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인간적인 쓸데없는 조문으로 가득 채워 이것들을 잘 지키는 것으로 스스로를 의롭게 보이려 했는데, 이 잘못된 인식의 뿌리가 매우 깊었다.[8] 이런 사람들에게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조항을 어겨도 된다는 발상이 나올 수 있을 리가 없으며, 설령 그 쓰러진 사람이 끝내 죽었다는 말을 들었어도 자신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을 뿐이라며 당당해 했을 것이다. 참된 안식일의 행동이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고 이들의 위선과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깨뜨리기 위해서라도 예수는 바리사이들과 충돌하는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다윗이 제사장에게만 허락된 진설병을 얻어먹은 예를 들면서 이것이 안식일을 범한 게 아님을 가르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즉 예수는 뭘 잘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바로 그런 이들을 정확하게 저격하여 깨닫게 할 목적으로 그런 비유를 든 것이다.

비유에서 등장한 제사장이나 레위 계급이 꼭 율법적인 위선자가 아니었고 다만 나름대로의 정당한 이유가 있었던 걸 보여주는 의미로도 적용이 가능한데, 그것이 시간이 됐든 돈이 됐든 자신의 평판이 됐든 희생이 전혀 없이 남을 돕기는 쉽지 않고, 따라서 우리 모두 일상생활에서 남을 돕기 곤란한 이유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만, 정말로 도움이 간절히 필요한 사람을 돕기 위해선 이런 걸 감수하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쉽게 생각해봐도 "자기 제사장 자격을 지키려고 죽어가는 사람을 모른 체 하는 일"이 성서적으로 옳은 행동일 리가 없다. 또한 자기 희생을 동반한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 성경의 기본적인 모티브이기도 하다. 예수가 활동하던 시대의 유대 사회에서 이렇게 사마리아인을 빗댄 비유는 충격적인 것이었다.[9]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을 부정하는 소수집단 사마리아인은 자신들의 일상에서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이단이었고, 도움을 받았다해도 그들을 사랑하라는 말은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던 것이다.

정통이든 이교도든 너를 값없이 사랑하는 자는 너의 이웃이라는 이러한 해석은 상식적인 선에서의 해석이고, 실제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곧 '예수를 대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하는 말과 같다. 율법학자가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29절에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예수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하며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라고 되묻는다. 이를 그대로 치환한다면 결국 '내 = 강도 만난 자 '라고 할 수 있는데, 결국 예수가 하고자 하는 말은 '강도 만난 것과 같은 너희를 내가 구원하기 위해 왔는데, 너희는 자신의 의, 자신의 깨끗함을 내세워서 나(=예수)를 사마리아인으로 취급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구하러 온 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였다.' 라는 것을 반증해서 드러내는 것이다. 즉, 남을 도와주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자(=비유 상 사마리안, 실제로 예수)' 마저 자신의 의, 자신들의 율법을 기준으로 사마리아인, 죄인 취급하는 (죄인과 세리, 창녀와 어울린다고 손가락질하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한 경고의 의미이다. 또한 '너도 가서 이같이 하여라' 라는 말은, 자기 의를 버리고 예수의 의를 받아들여, 죄인과 세리 등을 정죄하지 말고 자신처럼 그들의 친구가 되라는 것이다.

성경을 올바르게 보려면 큰 틀에서 봐야하는데, 루카복음 10장은 전체가 이러한 구성으로 되어있다. 곧, 자신의 정의감에 심취하여, 인간의 기준으로 21~24절 '지혜있고 슬기있는 자에게는 숨겨져 있다' 라는 말이 곧 실제로 지혜있는 자가 아니라, 인간의 기준으로 자신이 지혜있다고 여기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그들 스스로의 인간적 틀이 너무 확고한 나머지 하느님의 의가 들어갈 수가 없고,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숨겨진 것'이 되어서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뒤의 마리아와 마르다 비유에서도 이는 그대로 드러난다. 마르다에게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나 몇 가지만 하던지, 하나만 하라' 라고 하였다. 이는 예수를 섬기는 일, 곧 하느님을 위해서 자신 딴에는 하는 일들로 인해서 오히려 하느님의 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마르다의 경우는 아직 예수에게 책망받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러한 '자신의 의'가 더 발전한다면 바로 앞의 예시의 율법학자처럼 자신의 의가 너무 커져서 자신의 생명을 구한 자 마저 자비를 베푸는 것을 거절하게 된다는 것이 이 해석의 진정한 의미이다.

기존 문서 역사 중에 이러한 해석 자체가 '알레고리적 해석'이라고 삭제된 적이 있는데, 이는 과거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알레고리적 해석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삭제한 것이다. '알레고리'와 '알레고리적 해석'은 다른 것인데,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은 지나치게 자의적인 부분이 많아 '알레고리적 해석'이라고 비합리적이라고 오늘 개신교 교단에서 대부분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과 다르게 성경 자체의 풍유적 해석으로서 '알레고리'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 해석이 무리한 '알레고리적 해석'인지 아닌지를 따지려면 해당 에피소드의 전후 맥락과 앞뒤 절을 보면서 해석을 해야 하는데, 루카복음 10장 전체에서 나타내는 '어떠한 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인가' 라는 주제에서 이러한 에피소드가 들어간 것을 보면 이러한 해석은 과도한 알레고리적 해석을 빼고 핵심적인 부분에서는 알레고리로서 풍유법이 사용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성서적 의미가 아닌 스토리적 면에서 보면 이 이야기는 율법학자가 예수를 곤란하게 하려고 떠보는 이야기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옳다구나 하고 그럼 대체 그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모습을 볼 때 아마도 율법학자는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그럼 어느정도까지 도와야 하냐'며 예수가 곤란하게끔 그를 공격하고 싶었을지 모른다.[10] 따라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노골적으로 율법학자 스스로가 찔리도록 든 비유로 상당히 공격적이다. 먼저 '나'를 '강도 맞은 자'에게 비유하면서, 직설적으로 말하면 누굴 도와야 되겠냐고 물은 율법학자에게 '당장 살고 봐야 할 처지인데, 지금 당신이 누굴 골라 도울 처지가 아니다' 라며 질문의 상황 자체를 깨부수고 그 의중을 꾸짖고 있다. 또 이웃이 누구인지 물었는데 '그런 사람이 너의 이웃이다.'가 아닌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로 끝마침으로써, 단순히 '어려울 때 나를 돕는 이가 나의 이웃' 수준을 넘어 남이 어떤가보다 내가 어떤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둘째로, 반문의 형태와 흔한 비유를 통해 이미 다 답을 알고 있으면서 떠보려 하는, 그 의도가 명백한 질문을 꾸짖고 있다. 동시에 모든 답을 율법과 자기 자신 속에서 찾게 하여 함부로 그 답을 트집잡을 수 없게 함도 있다. 셋째로, 도움을 준 사람을 사마리아인으로 설정함으로써 유대인의 위선적 태도를 꼬집는다. 결국 율법학자는 마지막까지 사마리아인이 자신의 이웃임을 인정하지 못한다.

4. 인용

이 사건만 두고 보면 이 이야기는 어떤 교리를 설파하기 위함이라기보다도, 인간의 위선적 행태를 꼬집고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는 데에 초점이 있다. 이러한 위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주 흔하기에, 사마리아인이 멸시된다는 배경지식만 알아도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큰 무리가 없어 자주 인용되는 편이다. 사실 사마리아인이 멸시된다는 배경지식까지 없어도 사제와 레위인이 위선적이라는 것의 이해에는 큰 무리가 없다. 애초에 이 비유의 원전에서는 사마리아인도 평범한 농부였으니. 다만 내가 무시하던 존재가 나를 돕는다는 점에서 느껴지는 부끄러움은 좀 경감될 수 있다.

근래에 사마리아인 유대인의 역사가 많이 안 알려져서 함의가 좀 희석되었고, '사마리아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어째 대가를 바라지 않고 기꺼이 남을 돕는, 자비심 많은 인간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경향이 있다. 때문에 서구권에서는 병원 이름에 '선한 사마리아인(Good Samaritan)'을 많이 쓴다. 영화 다이 하드 시리즈 3편에선 별 생각없이 맥클레인을 돕다가 같이 곤경에 휩쓸리게 된 흑인 상인 제우스를 두고 악당 사이먼이 시종일관 사마리아인(Samaritan)이라고 비꼬는데 이 장면 역시 그런 의미에서 나온 것이다.

위기에 처한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의도치 않은 피해를 입히면 죄가 경감되거나, 자신이 위험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피해자를 돕지 않은 경우에는 처벌받는 선한 사마리아인 법의 개념도 여기서 나왔다.

교회 성당에서 흔히 예제로 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주제로 설교를 준비하던 신학생들조차, 설교에 늦지 않기 위해서 실제로 복도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돕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가더라"라는 내용의 예화가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다. 현실적으로 종교계에 돌고 있는 예화들의 거의 상당수가 출처 불명의 왜곡된 뜬소문 위주라는 것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부분인데, 1973년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실제 수행된 실험이 유래이다.[11]

해당 실험은 시간적 압박의 여부가 이타성을 감소시키는가에 대한 실험이었다. 신학생들에게 특정 주제에 대한 발표를 준비시키고 대학 내의 어떤 길로 지나오게 한 다음, 그 길목에 어딘가 아파보이는 척 하는 연기자를 배치했다. 길목에 있는 건물 문 앞에 있었기 때문에 예화로 들어지는 것처럼 환자를 뛰어넘어간 사람은 없었겠지만, 그냥 지나친 사람은 확실히 있었다. 흥미로운 건 이 실험에선 피험자들을 시간이 촉박하다고 한 경우, 시간에 여유가 있다고 한 경우를 나누고, 다시 준비시킨 발표 내용도 신학과에서 선호하는 직업에 대한 것과 선한 사마리아인의 일화에 대한 것으로 나눴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시간의 여유였다는 것이다. 즉 시간이 널널한 사람이 보다 많이 이 환자를 도와줬으며, 사마리아인 일화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느냐는 놀랍게도 그다지 차이를 내지 못했다.

이 실험이 민간 설교에 크게 퍼진 이유는 이 실험의 피험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크게 부끄러워하거나 결과를 보고 인상깊게 여겼는지, 후일 정식으로 목사가 된 뒤 이 일화를 반면교사로 직접 언급하는 경우가 여럿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2018년 기준으로 초등학교 6학년 도덕책에도 이 비유가 나온다.


[1] 개신교에서는 제사장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2] 레위인은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을 말한다. 참고로 유대인은 야곱의 후손이고, 유대인의 12지파는 야곱의 12명의 아들들의 후손이다. [3]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직자로써 거룩하게 자기 몸을 지켜야 하는데, 초주검인 이 상인을 돕다가 상인이 죽어버리면 도운 자신들이 오히려 부정해져버려 성직자 입장에서 낭패를 입는다. 유대교에 '시체를 만지는 자는 부정해진다'는 율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경우의 수를 따진 결과, 결국 제사장과 레위인은 튀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듯 하다. [4] 사마리아인은 유대인과 다른 민족들의 혼혈민족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오직 유대인만이 신에게 선택받은 거룩한 민족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신의 선택을 받지 못한 다른 민족과의 혼혈로 태어난 사마리아인들을 치욕으로 여겨, 멸시하고 짐승취급했다. [5]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사마리아인 문서 참조. [6] 심지어는 이 이야기 조금 전인 루카의 복음서 9:51-56에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를 반기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의 마을 이야기가 나온다. 야고보와 사도 요한은 화나서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라고 하지만, 예수는 그 둘을 꾸짖고 일행과 함께 다른 마을로 간다. [7] 제사장과 레위인을 면박주는 역할임은 동일 [8] 이것이 얼마나 한심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길바닥에 침을 뱉는 건 죄가 아니지만 그 침을 덮기 위해 발로 땅을 끌면 그게 땅을 경작한 ‘일’을 한 것이라 하여 죄이니 금지하는 조항이 있었다. 문제는 이게 유머가 아니라 실제로 진지하고 엄숙하게 다루어져서 이들이 이런 자잘한 조항을 잘 지킨다는 사실에 취해 자기들만큼 의로운 민족은 없다고 자아도취에 빠져있었다는 것이다. [9] 물론 이들이 신앙의 본질적인 주와의 사랑관계를 떠나있다보니 율법의 참된 의미가 완전히 가려진 탓에 급진적으로 보인 것이지, 실제 예수의 가르침은 그들의 잘못된 지식을 바로잡은 것일 뿐 율법에 적혀있지 않던 새로운 내용을 설파한 게 아니었다.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보는 율법의 하나님/신약의 하나님은 전세계를 보는 사랑의 하나님 같은 이분법 적인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으로, 구약 시기에도 사랑이 최고의 율법이었고, 약자나 이스라엘로 귀의하려는 외국인을 돕는 법이 존재하는 걸 통해 알 수 있듯이 이방인들도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는, 국가 단위로 제사장 적인 역할을 해야 할 나라가 이스라엘이었다. 예수가 율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왔다 하셨으며 오늘날에도 구약성경이 유효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초림으로 그림자 역할을 했던 일부 제사의식 등이 폐지되었을 뿐 율법도 사랑도 영원토록 동일하다는 게 성경의 교리이다. [10] 이는 현실에서도 자주 보이는 딜레마기도 하지만, 무슨 대답을 해도 트집잡을 부분이 생기는 질문이기도 하다. 만약 전부 도와야 한다고 하면 현실적으로 그것은 어렵다고 한다거나, 예수 당신은 왜 지금 당장 다른 이를 돕고 있지 않느냐고 트집잡을 수 있다. 만약 전부 돕진 않아도 된다고 한다면 돕지 않아도 될 범위의 사람들의 고충을 말하는 등의 방식으로 트집잡을 수 있다. 그런데 예수의 대답은 질문에 대해 전부 반문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쉽게 말해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로 답한 것이다. 일단 여기서부터 율법학자의 계획은 글렀다고 봐도 좋다. [11] Darley & Batson, 1973. 여기서 Batson이라는 인물은 위기 상황에서 타인을 돕는 것에 대한 연구 분야의 권위자이며, 방관자 효과와 관련된 유명한 실험들에도 관여했던 석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