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학문을 좋아해 절조를 닦으면서 태만하지 않았으며, 고결하게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홀로 서며, 빼앗을 수 없는 뜻을 가졌다. 무재, 현량방정 등으로 천거되었어도 나서지 않았다.
손휴가 즉위하자 특별히 징소했고 261년 가을 8월에는 광록대부를 지내면서 조서로 명을 받아 주혁과 함께 나라를 순시해 풍속을 살피며, 장수와 관리들의 청렴함, 혼탁함, 백성들의 질곡을 살폈다. 석위는 여러 차례 승진해 광록훈에 이르렀으며,
손호가 즉위하고 조정의 정사가 어지럽자 연로해 지병이 생겼다고 하소연하면서 물러날 것을 요청해 광록대부에 임명되었다.
280년에 진나라가 오를 공격해 평정하자
왕융이 방문했으며, 281년에
무제가 조서를 내려 석위의 청렴함을 칭찬하면서 의랑에 임명해 2천 석의 관질을 더하도록 했지만, 석위는 미친데다가 눈이 멀었다고 가장해 관직을 받지 않았다. 290년에 83세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