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이천 서씨 |
출생 | 1921년 9월 24일 |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회룡리[1] | |
사망 | 1944년 7월[2] |
경상북도 문경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78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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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서진구는 1921년 9월 24일 경상북도 문경군(현 문경시) 산북면 회룡리에서 태어났다.그는 1939년 대구사범학교에 재학하던 중 <반딧불>이라는 비밀교양지를 발간해 항일사상이 담긴 문예작품을 창작, 수집하는 등 문예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41년 2월 15일에 동교생 권쾌복, 배학보, 문홍의 등 15명과 함께 당시 대구시 대봉정 소재 유흥수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결사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했다. 다혁당은 대구사범학교에 조직된 비밀결사 문예부, 연구회의 항일정신을 계승하여 조직을 확대, 개편한 것으로, 문학, 미술, 학술, 운동 등 각 분야에 걸쳐 실력을 양성해 조국 독립을 꾀했다.
또한 다혁당은 조직을 교내에 국한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조직을 확대해 타교생 및 일반인까지도 포섭대상으로 삼았다. 조직으로는 당수, 부당수를 두었고 그 아래로 총무, 학술, 문예, 연구, 경기부 등 각 부서를 두었는데, 서진구는 그 중 연구부원의 일을 맡았다. 한편 다혁당은 당원의 비밀엄수 및 절대복종, 주2회 회합과 하급생지도 등을 당규약으로 정하고, 1941년 3월부터 동년 5월까지 세차례 모임을 갖고 당의 활동상황과 조직확대에 관하여 협의했다. 또한 이들은 동교 내 일본인으로 구성된 연습과 학생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심상과 학생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도 모색했다.
그러나 1941년 7월 <반딧불>이 일본 경찰의 손에 들어가면서 다혁당의 정체가 탄로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된 서진구는 2년여 간 미결수의 상태로 혹독한 고문을 치르다가 1943년 10월에야 가까스로 풀려났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이듬해인 1944년 7월경 자택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서진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88년 10월 2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