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서울 守國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및 腹藏遺物. 고려 고종 26년인 1239년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시대 불상과 그 안에 복장되어 있던 고려말 조선초의 복장유물 36종 84점. 현재 서울 은평구의 수국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보물 제1580호로 지정되어 있다.2. 내용
수국사의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아미타여래좌상과 그 복장유물 36종 84점으로, 1459년( 세조 5)에 20세의 나이로 요절한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懿敬)의 명복을 기원하고 왕실의 안녕과 수복을 축원하기 위해 왕실의 원찰(願刹)로서 수국사를 지으며 세조의 명으로 모시도록 한 고려시대의 불상이다.불상 내부에 들어있었던 다라니에 기록된 '일체여래전신사리보협진언 기해십월일 시중 최종준'(一切如來全身舍利宝篋眞言 己亥十月日 侍中 崔宗峻)이란 글을 통해 고려시대 1200년 경에 철원 최씨가문의 고관이었던 시중 최종준이 기해년 10월에 보시했음을 알 수 있고 연대 추적 결과 1239년에 만들어진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이전에는 철원 보개산 심원사에 봉안되어 있었으며, 고려말 최영장군 가문의 원불이기도 했다. 1459년에 조선 세조의 명으로 왕실 원찰불로서 서울 수국사에 모셔졌으며, 이후 세조가 남긴 유명에 따라 조선왕조 내내 왕실의 철저한 보호를 받아온 불상이다. 이 때문에 만들어진지 약 800년이 된 불상임에도 그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서울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21세기 현재 불상제작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불상 중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의 목불상으로 유명하다. 무엇보다도 일본 광륭사 목미륵반가사유상, 해인사 목희랑조사상 등의 목불상의 계보를 계승한 최초의 기년명 목불상으로 한국과 일본에 있어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또한 불상 내부에는 고려 시중 최종준(崔宗俊, ?∼1249)이 기해(1239)년에 인출하여 시납한 '일체여래전신사리보협진언', 1389년(고려 공양왕 원년)에 만들어진 개금기와 발원문, 밀교대장경과 아비달마대비파사론(6권 6첩) 등의 전적류, 다라니류, 오보병, 직물 등 고려말 조선초의 유물 36종 84점이 쏟아져 나왔다. 한국의 불교조각사, 불교전적, 직물사 연구에 대단히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는다.
3.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 서울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서울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 두산백과 : 서울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4. 보물 제1580호
수국사는 세조대왕의 큰 아들인 의경세자(懿敬世子)가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덕종으로 추존하고 넋을 위로하고자 1459년(세조 5)에 그의 능 근처에 정인사(正因寺)를 창건하였다. 이후 사찰을 현재의 장소로 옮겨 짓고 수국사(守國寺)로 개명하여 왕실을 안녕과 수복을 축원하는 원찰(願刹)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제작연대가 적힌 발원문이 없어 정확한 조성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중후한 얼굴과 건장한 형태미 그리고 이중으로 입은 착의법과 자연스러우면서 특징 있는 옷주름 등에서 13세기에서 14세기 전반기에 조성된 불상들과 양식적 특징이 유사하다. 즉, 힘과 중후함이 느껴지는 얼굴과 신체는 물론 왼쪽 어깨에서 짧고 촘촘하게 흘러내린 주림이 좁은 겹 오메가(Ω)형의 주름을 형성하고 있는 점과 금구 장식 없이 간결하게 처리된 승각기의 표현 등은 서산 개심사 아미타여래좌상(1280년 중수), 서울 개운사 아미타여래좌상(1274년경), 나주 심향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544호) 등 13세기 중·후반 경의 불상들과 비교된다. 특히 이 불상에서 느껴지는 중량감 넘치는 건장한 남성적인 형태미는 고려후기 귀족풍의 단정하고 아담한 형태미를 추구했던 하나의 조류와는 또 다른 불교조각의 흐름과 미의식을 알려 주고 있어 그 의미가 크다.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제작연대가 적힌 발원문이 없어 정확한 조성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중후한 얼굴과 건장한 형태미 그리고 이중으로 입은 착의법과 자연스러우면서 특징 있는 옷주름 등에서 13세기에서 14세기 전반기에 조성된 불상들과 양식적 특징이 유사하다. 즉, 힘과 중후함이 느껴지는 얼굴과 신체는 물론 왼쪽 어깨에서 짧고 촘촘하게 흘러내린 주림이 좁은 겹 오메가(Ω)형의 주름을 형성하고 있는 점과 금구 장식 없이 간결하게 처리된 승각기의 표현 등은 서산 개심사 아미타여래좌상(1280년 중수), 서울 개운사 아미타여래좌상(1274년경), 나주 심향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544호) 등 13세기 중·후반 경의 불상들과 비교된다. 특히 이 불상에서 느껴지는 중량감 넘치는 건장한 남성적인 형태미는 고려후기 귀족풍의 단정하고 아담한 형태미를 추구했던 하나의 조류와는 또 다른 불교조각의 흐름과 미의식을 알려 주고 있어 그 의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