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生佛불교 용어로서 살아 있는(生) 부처(佛)를 뜻하는 말. 비슷한 의미로 활불(活佛)이라는 표현도 있다.
뛰어난 법력 및 인품을 지닌 고승 중 일부가 받는 별칭이다. 생불이란 명칭 자체는 여러 지역에서 누구든 존경받는 스님이면 받을 수 있다.[1]
아래는 20세기 특히 70~80년대 기준 공식적인건 아니지만 이른바 '세계 4대 생불'이라 불리웠던 사람들이다. 물론 세계 몇대 운운하는 내용들이 그러하듯이 출처가 필요하다.
- 베트남 출신으로 전쟁 당시 불교 평화 대표단의 단장으로 가서 남, 북 어디에도 지지를 표하지 않고 반전 운동을 펼친 틱낫한 스님
- 티베트를 무력 점거한 중화인민공화국조차 용서한다고 말한 달라이 라마 14세
- 킬링 필드 캄보디아에서 간디라고 불리며 비폭력 평화 운동으로 유명한 고사난다 스님
- 한국에서보다 외국에서 더 유명하며, 한국 특유의 선불교의 대표자로 불린 숭산 스님
2. 비유적 의미
일종의 속어로서 엄청나게 큰 마음씨를 가진 대인군자를 호칭하는 말로 쓰인다. 노상추일기에도 나오는 것을 보면 조선 시대에도 '생불'이라는 속어가 지금과 같은 의미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1777년 무과에 낙방하고 서울을 떠난 노상추가 난데없는 폭우에 묵을 곳이 없었을 때 김 부장이라는 사람이 노상추와 노상추의 동행들에게 그날 자신의 집에서 묵게 해 주고 식사도 제공해 주었는데, 노상추는 그를 '생불'이라고 부르며 감사를 표했다.入城內李五必家, 留宿, 以今二十四日, 設討逆陳賀, 庭試設行云, 而余與鄭敬由及淸之, 約行還鄕爲計. 鄭和卿留見陳賀, 知設科與否, 然後還鄕爲計. 與二友, 二十二日發行, 出南大門, 風雨從西南來, 冒雨到漢津, 風波大起, 且大雨如注, 莫適所向矣. 有一丈夫語曰, 當此風雨, 此無店幕, 何以爲之, 余對曰, 救人於因厄之際, 是善事指導, 安過一夜之道如何, 卽答曰然矣, 我家雖陋, 第來之從往, 厥家, 金部將爲號者也. 向暮風殘雨息, 余與敬由, 宿此而留卜物, 淸之則乘暮渡江, 送敬由奴馬及余馬, 命喂于沙坪店, 二人宿江上冷窓, 主人善待突溫飯善, 故安寢, 是所謂生人之佛, 谷谷有之者也.
성내(城內)로 들어가 이오필(李五必)의 집에 머물러 묵었다. 지금 24일에 역적을 토벌해 진하(陳賀)하고 정시(庭試)를 실시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정경유(鄭敬由) · 정청지(鄭淸之)와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약속하였다. 정화경(鄭和卿)은 머물면서 진하(陳賀)를 보고 과거를 실시하는지 여부를 알아본 뒤에 고향으로 돌아올 계획이다. 두 친구 정경유 · 정청지와 함께 22일에 출발해 남대문(南大門)을 나서니 비바람이 서남쪽에서 불어왔다. 비를 무릅쓰고 한강진(漢江津)에 도착하니 풍파가 거세게 일었다. 또 큰 비가 퍼붓듯이 내리는데 적당히 갈 곳이 없었다. 한 장부(丈夫)가 말하기를
“이와 같은 비바람을 만났는데 여기에 주막이 없으니 어찌하려는가?”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재앙이 있는 때에 착한 일로 사람을 구하고, 하룻밤을 편히 지낼 수 있는 방도를 인도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그가 즉시 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우리 집이 누추합니다만 따라 오십시오.”
라고 하였다. 그 집으로 따라갔는데 김(金) 부장(部將)이라는 사람이었다. 저물녘에 바람이 잦아들고 비가 멈추었다. 나와 정경유는 이곳에 묵으면서 짐을 두었고, 정청지는 저물녘에 강을 건넜다. 정경유의 말과 남자 종, 그리고 나의 말은 사평점(沙坪店)으로 보내어 말을 먹이도록 명하고, 나와 정경유 두 사람은 강변의 냉창(冷窓)에서 잤는데, 주인이 따뜻한 방과 좋은 식사로 잘 대접해주어서 편안히 잤다. 이 사람은 이른바 살아있는 부처인데, 마을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있다(是所謂生人之佛, 谷谷有之者也).
노상추일기 정유년( 1777년) 9월 20일 #
성내(城內)로 들어가 이오필(李五必)의 집에 머물러 묵었다. 지금 24일에 역적을 토벌해 진하(陳賀)하고 정시(庭試)를 실시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정경유(鄭敬由) · 정청지(鄭淸之)와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약속하였다. 정화경(鄭和卿)은 머물면서 진하(陳賀)를 보고 과거를 실시하는지 여부를 알아본 뒤에 고향으로 돌아올 계획이다. 두 친구 정경유 · 정청지와 함께 22일에 출발해 남대문(南大門)을 나서니 비바람이 서남쪽에서 불어왔다. 비를 무릅쓰고 한강진(漢江津)에 도착하니 풍파가 거세게 일었다. 또 큰 비가 퍼붓듯이 내리는데 적당히 갈 곳이 없었다. 한 장부(丈夫)가 말하기를
“이와 같은 비바람을 만났는데 여기에 주막이 없으니 어찌하려는가?”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재앙이 있는 때에 착한 일로 사람을 구하고, 하룻밤을 편히 지낼 수 있는 방도를 인도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그가 즉시 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우리 집이 누추합니다만 따라 오십시오.”
라고 하였다. 그 집으로 따라갔는데 김(金) 부장(部將)이라는 사람이었다. 저물녘에 바람이 잦아들고 비가 멈추었다. 나와 정경유는 이곳에 묵으면서 짐을 두었고, 정청지는 저물녘에 강을 건넜다. 정경유의 말과 남자 종, 그리고 나의 말은 사평점(沙坪店)으로 보내어 말을 먹이도록 명하고, 나와 정경유 두 사람은 강변의 냉창(冷窓)에서 잤는데, 주인이 따뜻한 방과 좋은 식사로 잘 대접해주어서 편안히 잤다. 이 사람은 이른바 살아있는 부처인데, 마을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있다(是所謂生人之佛, 谷谷有之者也).
노상추일기 정유년( 1777년) 9월 20일 #
생불은 보통 대인군자보다도 한수 위로 자기 주변에 직접적으로 자기 인생을 말아먹을 X맨들이 깔렸음에도 대인군자의 면모를 보여줄때 붙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주변 상황이 그렇게 심각하게 나쁘지 않다 하더라도 본인의 인덕 자체가 정말 궤를 달리할 정도로 뛰어나서 생불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
스님이 아닌 경우에도 불리는 경우는 있다. 예를 들어
태국에서는
태국 국왕을 생불로 여긴다. 물론 우상화 정책이라고 대내외적으로 비판하는 세력도 있으니 진지하게 들으면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