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13 01:51:52

살불살조

1. 개요2. 유래3. 해석4. 여담
고사성어
죽일 살 부처 불 죽일 살 할아비 조

1. 개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 부나 명예, 그 무엇에도 현혹되지 말고 스스로의 길을 가라는 뜻이다. 선종에서 내려오는 고사성어이다.

2. 유래

당나라 승려 임제의현(臨濟義玄)의 법어로써, 제자인 혜연(慧然)이 의현의 언행을 엮은 〈임제록〉에 해당 내용이 나온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逢佛殺佛),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일 것이며(逢祖殺祖),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逢羅漢殺羅漢),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야만(逢父母殺父母) 비로소 해탈할 것이다.

이는 곧 어떠한 대상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마음을 청정히 비워서 궁극의 진리를 온전히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제시한 말이다.

어찌보면 지나친 교조주의, 근본주의를 경계하는 말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3. 해석

Mātaraṃ pitaraṃ hantvā,
rājāno dve ca khattiye,
Raṭṭhaṃ sānucaraṃ hantvā,
anīgho yāti brāhmaṇo.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이고
크샤트리아 출신의 두 왕을 살해하고
왕국과 그 신하도 쳐부수고
바라문은 동요없이 지낸다.”
담마빠다(법구경) 294번째 게송
mātaraṃ pitaraṃ hantvā
rājāno dve ca sotthiye
veyyagghapañcamaṃ hantvā
anīgho yāti brāhmaṇo.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이고
학자인 두 왕을 살해하고
다섯 번째 호랑이터를 쳐부수고
바라문은 동요없이 지낸다."
담마빠다(법구경) 295번째 게송

법구경(담마빠다) 294번째, 295번째 게송에는 석가모니 부처가 읊은 위와 같은 게송이 등장하는데, 해당 게송의 인연담은 ‘라꾼따까 밧디야와 관련된 이야기Lakuṇṭakabhaddiyattheravatthu)’로 알려져 있다. 어느 날 먼 곳에서 비구들이 석가모니 부처를 뵈러 사왓띠의 제따와나 비하라(기원정사)에 왔는데, 마침 키가 아주 작은 장로 라꾼따까 밧디야가 석가모니 부처가 계신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을 지나고 있었다. 이에 석가모니 부처는 라꾼따까 밧디야를 가리켜서 “수행승들이여, 보라. 저기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이고 괴로움에서 해탈한 수행승이 걸어가고 있다.”라고 했다. 이에 수행승들이 어리둥절하고 의아해 하며 서로 얼굴을 쳐다 보다가 “세존이시여, 무엇을 말씀하신 것입니까?”라며 물었다. 이에 석가모니 부처가 읊은 게송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것이다. 한역 불경인 법구경이나 출요경에도 비슷한 게송이 등장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명의 왕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담마빠다의 주석서에는 우선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어머니가 사람을 낳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갈애가 세 가지 세계[三界: tiloka]의 존재를 낳기 때문이다."
DhpA.III.454
“ ‘내가 있다는 자만’은 ‘나는 이러이러한 왕이나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버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DhpA.III.454

라고 해서 각각 '자만'과 '갈애'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어머니를 죽이라', '아버지를 죽이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자신의 부모를 죽이라는 말이 아니라 갈애와 자만을 죽이라는 말과 같다. 석가모니 부처는 아들 라훌라 존자에게 “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맛지마 니까야 62 22)라고 말한 바 있는데, 어떤 사람 혹은 사물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라 했을 때에 일으키는 감정이 갈애(taṇhā)이고, 어떤 것을 들어 ‘이것이 진정한 나’이고 '상대방과 구별되는 나'라 했을 때 이는 자만(mana)이 된다. 이 모두가 ‘나의 자아가 있다’라고 보는 것에서 비롯된다. 나의 '자아'는 다름 아닌 유신견(有身見:sakkāyadiṭṭhi)이다. 그런데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성자의 흐름에 결코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갈애는 세세생생 윤회하는 원인이 된다.

임제의현이나 담마빠다에서 아버지를 무명, 어머니를 애착으로 설명한 것은 그만큼 번뇌의 힘이 강력함을 명징하게 드러내고 역설한 것이다. 나를 낳아 기른 부모나, 내가 속한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처럼 강력하게 나를 얽어맬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 갈애와 자만, 혹은 무명과 애착은 현실적으로 나를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자,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욕망하지 않으면 삶의 의미를 상실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중생들이 갖고 있는 커다란 착각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하는 원인, 그것이 바로 갈애이며, 자만이며, 무명이며, 애착이라는 것이다. #

왕족 출신의 두 명의 왕, 학자인 두 왕이라는 표현도 법구경 주석서에는
“백성들이 왕에게 가는 것처럼 모든 형이상학적 견해는 영원주의(常見: sassatadiṭṭhi)와 허무주의(斷見: ucchedadiṭṭhi)의 두 가지 견해로 귀결된다.[1] 그래서 그것들을 왕족의 두 왕이라고 한다.”
DhpA.III.454
왕국과 그 신하는 열두 가지의 감역(十二處: dvādasāyatanani)을 말하고 그것들의 편재적 성격 때문에 왕국이라고 불린다. 감역에서의 쾌락을 추구하는 갈애는 감역의 왕국에 의존하기 때문에 세금을 징수하는 세무원처럼 신하라고 불리운다.”
(DhpA.III.454)

라고 설명되어 있다. '호랑이터'라는 것은 공포의 대상이자 걸림돌이 되는 '회의적 의심'이다. 호랑이가 있으면 여행길이 위험하고 어려운 것처럼 의심이 있으면 팔정도를 실천하기 어려움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불경에는 수행을 방해하는 다섯 가지 장애를 언급하는데, 곧 감각적 욕망(kāmāchanda), 악의(vyāpāda), 게으름과 무기력(thīna-middha, 해태와 혼침), 흥분과 혼란(uddhacca-kukucca, 들뜸과 후회), 의심(vicikicchā, 회의적 의심)으로, 다섯 번째인 회의적 의심까지 모두 쳐부수는 것을 ‘다섯 번째 호랑이터’라고 불린 것이다.[2]

한국의 담마빠다 빨리어 원전 번역에는 이를 반영해 '아버지'와 '어머니', '두 명의 왕'이 아니라 '갈애'와 '자만', '형이상학적 견해'라고 번역해 두었다.

4. 여담



살불살조를 주제로 힙합풍의 AI 음악으로 편곡한 유튜버도 있다. 첨언하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는 말은 임제록에 실려 있는 임제의현의 말이지만,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칠 때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주먹으로 때려죽여서 개 먹이로 줬을 것이다"라는 후덜덜한 말은 임제의현보다 후대의 선승인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의 말이다.
我當時,若見一棒打殺,與狗子喫,貴要天下太平
내가 만약 당시에 그 모습을 보았다면, 한 방망이로 때려 죽여 개에게 먹으라고 줌으로써 천하를 태평하게 했으리라.
《대장일람집》 권10 #

운문문언은 청도 운문사의 이름의 유래이기도 하고, 유명한 ' 똥막대기'라는 말도 이 사람이 원조다. # 물론 이 후덜덜한 발언과 달리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는 따스한 말도 남겼다. 이러한 운문문언의 발언들은 모두 벽암록에 실려 있다. #


[1]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불교에서는 변집견(邊執見)이라고 해서 각자가 하나의 양극단이고 중도를 실천함에 있어 방해가 되는 장애물로 간주된다. [2] 굳이 다섯 번째 호랑이 터만 언급한 것은 이미 앞서의 네 가지 호랑이터는 무사히 지나왔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최종 던전까지 클리어한 사람에게 굳이 지금까지 다른 던전도 클리어하고 왔는지 의심할 필요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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