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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라 슈멀러

파일: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로고.svg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파일:캐나다 국기.svg 캐나다 여자 컬링 국가대표
스킵 서드 세컨드 리드 핍스
산드라 슈멀러 잔 베커 조안 맥커스커 마르시아 구더아잇 아티나 포드[1]

<colbgcolor=#87ceeb><colcolor=#ffffff> 산드라 슈멀러
Sandra Schmirler
파일:Sandra_Schmirler.jpg
본명 산드라 마리 슈멀러
Sandra Marie Schmirler
출생 1963년 6월 11일
캐나다 자치령 서스캐처원 주 비가
사망 2000년 3월 2일 (향년 36세)
캐나다 서스캐처원 주 리자이나
국적
[[캐나다|]][[틀:국기|]][[틀:국기|]]
종목 컬링
1. 개요2. 선수 경력3. 투병과 죽음4. 사후5. 수상 기록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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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캐나다의 前 컬링 선수이다. "같은 선수 구성으로는 세계여자컬링선수권대회에서 3번 우승하지 못한다."는 징크스를 깼으며, 컬링이 올림픽 첫 정식 종목이 됐던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의 여자 컬링 금메달리스트였다. 당시 캐나다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으나[2], 2000년 36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2019년 2월 캐나다 스포츠 전문 채널 TSN에서 자국 컬링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역대 최고의 여자 컬링 선수 2위에 선정됐다.[3] 그에 앞서 진행된 최고의 팀에서는 슈멀러의 팀이 1위로 선정됐으며, 팬들을 상대로 한 투표에서도 최고의 팀으로 뽑혔다. 포지션 별 최고 선수는 제니퍼 존스 팀이 더 많이 뽑혔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최고의 팀 선정에는 2위로 밀렸다.

2. 선수 경력

2.1. 유년기

3녀 중 막내로 어렸을 때부터 스포츠를 좋아했다. 학창 시절에도 배구, 배드민턴, 소프트볼, 아이스하키 등 다양한 운동을 즐겼다. 컬링은 12살 때 시작했다. 12학년(우리나라로 치면 고등학교 3학년) 때는 팀의 서드를 맡았는데, 전승으로 서스캐처원선수권을 석권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리자이나의 레저 센터에 취업한 후 여전히 컬링 선수로 활동하며 'Schmirler the Curler'라고 자칭했다. 1987년 캐시 팔만 팀의 서드로 첫 지역 챔피언이 되면서 스코티스 토너먼트 오브 허츠[4](이하 STOH)에 출전했으나 4위에 그쳤다. 이후 지역선수권 석권마저 실패하며 1988-1989 시즌을 앞두고 세컨드인 잔 베커와 함께 팀에서 나와 새로운 팀을 꾸렸다. 1990-1991 시즌에 세컨드로 조안 잉글리스[5]를 영입하고, 잉글리스의 추천으로 마르시아 쉬믈[6]을 영입했다. 팀을 꾸린 첫 해였음에도 지역선수권에서 우승했으며 STOH에서는 4위를 했다.

2.2. 국가대표

1993년 STOH에서 마침내 우승했다. 서스캐처원 팀이 STOH에서 우승한 건 1980년 이후 13년만이었다. 그리고 그 해 3월 말에 열린 세계선수권에서도 우승했다.

이듬해 1994년 STOH에서도 우승했고, 이어 세계선수권에서도 우승하며 대회 2연패에 성공했다.

이후에는 STOH에서 우승하지 못하다가 1997년에 3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당시 세계여자컬링선수권에서는 같은 선수 구성으로는 3번 우승하지 못한다는 징크스[7]가 있었다. 3번째 세계선수권에 출전하게 된 슈멀러의 팀은 1990-1991 시즌 이후로 8년째 선수가 바뀌지 않아서 딱 그 징크스에 해당됐는데, 예선에서 독일에게 1번 졌을 뿐 나머지 경기는 전부 이겨 그 징크스를 보기 좋게 깨버렸다.

2.3.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컬링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1997년 11월 캐나다 컬링 대표팀 선발대회가 열렸다. 당시 슈멀러는 장녀 새라를 출산한지 불과 10주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 결승까지 진출했으며 결승전에서는 섀넌 클레이브링크 팀을 꺾고 우승했다.[8]

올림픽 본 대회에서는 6승 1패로 예선 1위로 결선에 진출, 준결승에서는 영국을 상대로 엑스트라 엔드까지 가는 승부 끝에 6대5 신승을 거뒀고, 결승에서는 덴마크를 상대로 9엔드 이후 악수를 얻어내며 금메달을 땄다.

올림픽 이후 열린 1998년 STOH에서는 3위에 그쳤지만, 슈멀러를 비롯한 팀 동료들은 리자이나 대학으로부터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캐내디언 프레스에서는 슈멀러 팀을 올해의 팀으로 선정했으며 1999년 캐나다 컬링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다.

3. 투병과 죽음

1998년 STOH 이후 슈멀러는 둘째를 임신하면서 잠시 휴식기를 갖기로 했다. 그런데 1999년 6월 차녀 제나를 낳은 후 슈멀러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됐다. 임신 당시에는 허리 통증이 계속돼 단순히 임신으로 인한 통증으로 여겼으나 출산 후에는 복통을 호소했는데, 검진 결과 암이 있다는 게 드러났다.[9] 정확하게 슈멀러의 암은 전이성 선암이었는데, 진단 당시 암 발생 부위를 특정할 수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방사선 치료 등 항암 치료에 대체의학의 치료 방법까지 동원했으나 발병의 원인을 제거하지 못했기에 다른 부위로의 전이만 막는 정도였다. 나중에야 암 발생 부위가 심장 뒷부분으로 드러났는데, 일찍 알았더라도 부위가 부위였던지라 제거 수술도 힘들었을 것이다. 1999년 9월에는 혈전을 제거하기 위해 수술을 받다가 심정지를 일으켜 죽을 뻔 하기도 했다.

슈멀러는 한동안 대중의 시선을 피하며 치료에만 전념했으나, 숨어만 지내는 게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해 2000년 주니어선수권, STOH, 브라이어 등의 해설자를 맡기로 하고 주니어선수권 대회 도중 자신의 투병 사실을 알렸다. 자신의 건강에 대해 곧 회복할 것이며 다음해 STOH에서는 선수로 돌아오리라고 약속했으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주니어선수권 이후 암은 이미 폐로 전이돼 더 이상의 항암 치료가 무의미할 정도 심각한 상황이었기에 완화 치료(Palliative Care)에 들어갔다. 2000년 3월 2일 슈멀러는 수면 중 숨을 거뒀다.

4. 사후

슈멀러의 장례식에는 1만 5천여명이 참석했다. 장 크레티앵 당시 캐나다의 총리는 슈멀러를 추모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서스캐처원의 모든 공공기관은 조기를 걸면서 당대 최고의 컬링선수를 잃은 슬픔을 함께 했다. 남편 섀넌 잉글랜드의 요청으로 유족들이 잡히지 않는 조건으로 슈멀러의 장례식이 생중계됐는데, 캐나다 운동선수의 장례식이 TV로 생중계가 된 건 슈멀러의 장례식이 처음이었다. 마침 브라이어[10]가 열리고 있었던 때였는데 경기가 지연되면서 브라이어가 열리는 경기장에서도 슈멀러의 장례식이 생중계가 되었다.

STOH는 1997년부터 MVP를 선정했는데[11], 2001년부터 '산드라 슈멀러 MVP 상'으로 이름을 바꿨다. 슈멀러가 생전 근무했던 레저 센터는 '산드라 슈멀러 레저 센터'로 이름을 바꾸었고, 슈멀러의 고향인 비가에는 슈멀러의 이름을 딴 공원이 만들어졌다.

생전 슈멀러의 뜻에 따라 2001년 미숙아나 중환자 신생아를 위한 장비를 제공하고 유소년 컬링선수들에게는 장학금을 제공하는 산드라 슈멀러 재단이 출범했다. 매년 STOH 대회 도중 '산드라 슈멀러 날'을 정해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재단 기금을 모으는 일을 돕는다.

2000년 서스캐처원 수훈 훈장이 추서됐고, 같은 해 캐나다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2009년에는 세계컬링연맹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잔 베커는 주변의 권유에도 자신이 슈멀러를 잇기엔 부족하다며 한동안 컬링을 관뒀다가 2003년 마르시아 구더아잇과 함께 복귀했고, 2007년 STOH에서 2위를 했다. 원래 초등학교 교사였던 조안 맥커스커는 2001년부터 CBC의 컬링 해설을 맡았다.

5. 수상 기록

올림픽
금메달 1998 나가노 단체전
세계선수권
금메달 1993 제네바 단체전
금메달 1994 오베르스트도르프 단체전
금메달 1997 베른 단체전

6. 기타

  • 내반족으로 태어나 한동안 교정기를 착용했다고 한다.
  • 1987년 델 피터슨과 결혼했다가 1991년에 이혼했으나 1995년까지 전 남편의 성을 그대로 썼었다. 그러다 1993년 마르시아 구더아잇의 소개로 섀넌 잉글랜드를 만나 1996년에 재혼했다. 재혼한 후에는 결혼 전 성을 유지했다.
  • 장녀 새라 잉글랜드도 컬링선수로,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서스캐처원 대표선수로 캐나다 주니어선수권에 참가했다.

[1] Atina Ford이며, 어머니인 아니타 포드(Anita Ford)는 당시 슈멀러 팀의 코치를 맡았다. [2] 슈멀러가 사망한지 4년이 지난 2004년에 캐나다 국영방송인 CBC에서 캐나다인들을 상대로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위대한 캐나다인 100인을 선정했는데 그 중 81위로 컬링선수로는 유일하게 100인 안에 포함됐다. [3] 1위는 제니퍼 존스 [4] 캐나다 여자 컬링선수권 대회 [5] 이후 결혼하며 조안 맥커스커가 된다. [6] 이후 결혼하며 마르시아 구더아잇이 된다. [7] 노르웨이의 도르디 노르드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90년과 1991년 세계선수권 2연패를 달성했지만 이후로는 번번이 결승에서 고배를 마셨다. 이후 노르드비는 2007년 은퇴할 때까지 멤버도 교체하며 세계선수권에 도전해 3개의 은메달과 6개의 동메달을 땄지만 금메달은 끝내 추가하지 못했다. 참고로 슈멀러와 라이벌이었던 스웨덴의 엘리사베트 구스타프손은 똑같은 멤버로 4번 우승해 슈멀러의 기록을 경신했다. [8] 하우스 끝에 걸친 스톤을 치고 1번 스톤을 제거하는, 고난도의 샷이다. 슈멀러 스스로가 꼽은 자신의 인생 최고의 샷이기도 하다. [9] 공교롭게도 1999년 4월에 슈멀러의 아버지가 암 투병 끝에 사망했다. [10] 캐나다 남자 컬링 선수권 대회 [11] 참고로 이 상의 첫번째 수상자가 슈멀러 팀의 리드인 마르시아 구더아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