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전 한국통감이자 제2차 한일협약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의해 암살되자, 일부 조선인들이 결성한 단체.2. 상세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일진회에서 이토 히로부미 전 통감 살해는 결코 조선 전체의 뜻이 아니었다는걸 일본에 설명하겠다면서 결성되었다.일진회 회원이 아닌 사람들 중에도 안중근의 의거가 괜한 짓이었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도 있어서, 전국 13도 사죄단을 결성하고 13도 대표들로 사죄단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나중에서야 일진회가 사죄단의 배후라는게 드러나면서, 일진회와 일진회 회원이 아니면서 사죄단에 참여한 사람들이 주도권 다툼을 벌이면서 사죄단의 활동은 어려움을 겪었다.
내분으로 인해서 활동자금 조달이 어려워지자 천일은행에서 3천원을 대출받으려 했으나, 민족계 은행으로 꼽히던 천일은행은 대출을 거부했고 3천원 조달을 일반모금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모금도 지지부진했다. 결국 이도저도 안되자 만만한 부자 10명을 국민대표라면서 자금을 내놓으라고 하자 이 국민대표로 선정된 13도 대표중 한명이 탈퇴하는 등의 일이 벌어졌다.
결국 당초 계획된 일정보다 매우 늦은 12월 19일에서야 8명의 대표들이 일본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부산까지 도착했을때 여비가 떨어져서 6명이 여비없인 못가겠다고 이탈해버리고 결국 일본에는 송학승이란 사람과 경주 사람 정인창이란 사람만 겨우 도착했다고 한다.
이들은 이토의 무덤에서 사죄문을 읽고 대성통곡을 했으며 유가족을 방문해 사죄했다. 이토의 유족들은 고생하셨다면서 식사를 대접했다고 하는데, 이 소식이 조선에 알려지자 베델과 양기탁이 운영하던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는 거지짓을 할데가 없어서 일본까지 가서 거지짓을 하냐라고 비꼴 정도였다.
이후 대한제국에 귀국하여, 대한제국 내각에 여비를 보전해 달라는 등의 상소를 올렸다고 한다.
이 단체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낸 "친일협력단체사전"에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