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룬테라에는 용맹한 챔피언이 넘쳐나지만 뽀삐만큼 끈기 넘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 굳센 요들은 자기 키 두 배나 되는 망치를 짊어지고 이 망치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전설 속 ‘데마시아의 영웅’을 오랜 시간 찾아다녔다. 전설에 따르면, 오직 이 영웅만이 망치에 잠재된 힘을 모두 끌어내어 진정 위대한 데마시아를 이룩할 수 있다고 한다. 전설의 용사를 찾아 뽀삐는 왕국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 주인이 될 법한 이에게 망치를 건네 보았으나 번번이 처참한 결과가 따랐고 목숨을 잃은 전사도 있었다. 다른 이라면 오래 전에 과업을 포기했겠지만, 불굴의 전사 뽀삐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용기와 의지의 소유자이다. 예전의 그녀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기억할 수 없는 오래 전부터 뽀삐는 삶의 목적을 찾아 헤맸다. 요란스럽고 엉뚱한 보통 요들과는 달리 안정적이고 짜임새 있는 삶을 원했기에 홀로 외로움을 느꼈다. 다른 삶을 찾아 떠난 여정에서 뽀삐는 발로란 서쪽, 인간의 정착지까지 흘러 들어갔다. 거기서 그녀는 끝없이 이어지는 유랑민의 행렬을 감탄하며 바라보게 된다. 대부분은 행색이 누추하고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지평선 너머에 있을지 모르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덧없는 발걸음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어딘가 달라보이는 무리가 지나갔다. 보통의 방랑자와 달리 이들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는 듯했다. 아침마다 파수꾼의 뿔 피리 소리와 함께 모두 같은 시각에 일어났다. 매일 정시에 다같이 식사하고 몇 분 안에 식사를 끝냈다. 야영지를 세우고 허물 때도 군더더기 없이 능숙하게 해냈다. 요들은 타고난 마력으로 놀라운 일을 해낸다지만 그 인간 무리는 조직력과 규율로 그런 놀라운 일을 똑같이 해내고 있었다.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행동하면서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고 강력해지는 것이었다. 뽀삐에겐 그 모습이 세상 어떤 마법보다 황홀했다. 뽀삐는 은신처에 숨어 야영지를 지켜보았다. 한 천막에서 반짝이는 갑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리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번쩍이는 강철을 덧댄 미늘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강철 미늘이 서로 겹쳐져 하나의 갑옷을 이루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의 이름은 오를론이었고 그는 존재만으로 모두의 마음을 울리는 듯했다. 의기소침한 자가 있으면 그는 여기까지 온 목적을 다시 일깨워 줬고, 지쳐 쓰러진 자가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힘을 북돋워 주었다. 요들도 마법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는 마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이루어 냈다. 더 가까이서 보려고 뽀삐는 슬금슬금 다가갔다. 운명에 이끌리듯 자기도 모르게 그 지휘관을 따라다녔다. 오를론이 병사를 훈련하는 모습을 주의 깊게 살폈다. 거구가 아님에도 거대한 망치를 아주 민첩하게 흔들었다. 뽀삐는 늦은 밤, 오를론이 무리의 장로와 소리를 낮추고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야영지를 허물고 서쪽으로 이동해 완전히 정착하려는 계획이었다. 듣자마자 수없이 많은 질문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오를론은 어디로 가는 걸까? 대체 어디서 왔을까? 어떻게 무리를 저렇게 일사불란하게 조직할 수 있었을까? 요들도 받아 줄까? 순간, 뽀삐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드디어 통하는 이를 만났으니 처음으로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기로 한 것이다. 물론 처음엔 쉽지 않았다. 오를론도 뽀삐만큼이나 질문이 많았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둘은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오를론은 뽀삐의 스승이 되고 뽀삐는 그의 사명에 모든 걸 바쳤다. 훈련할 때 뽀삐는 반드시 필요한 겨루기 상대였다. 오를론에게 주저 없이 덤비는 자는 그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무조건 순종하지도 않았다. 명령엔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걸 모르는 듯,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으로 오를론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뽀삐는 그렇게 그를 따라 새로운 곳에 정착했고 그곳은 데마시아라는 새 왕국이 되었다. 데마시아는 지위 고하와 배경을 막론하고 대의를 위해 몸 바칠 이라면 누구든 반겼다. 왕국 곳곳에서 오를론은 추앙 받았다. 그는 망치를 거의 휘두르지 않았지만 항상 등에 지고 다녔고, 그렇게 망치는 신생국 데마시아의 상징으로 받들어졌다. 항간에는 망치가 산을 무너뜨리고 대지를 산산조각낼 괴력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시간이 흐르고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오를론은 왕국이 오랫동안 번성하길 바라며 망치를 뽀삐에게 주었다. 그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망치의 기원을 이야기하며 진정한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고 했다. 망치는 마땅히 데마시아의 영웅에게 돌아가야 하고, 그자만이 데마시아를 하나로 이끌어갈 수 있다는 말도 전했다. 오랜 친구의 마지막 숨을 지켜보며 뽀삐는 그 영웅을 찾아 망치를 쥐여 주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뽀삐는 의지는 강했으나 자부심은 부족했던 것 같다. 오를론이 말한 그 영웅이 사실은 자신일지 모른단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
2. 사냥꾼
뽀삐는 브라이어 늑대에게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녀석이 지금 자길 물어뜯으려 하는 것만 아니라면. 이미 사냥감을 하나 해치운 듯 녀석의 주둥이는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녀석의 다음 사냥감이 되고 싶진 않았다. 뽀삐는 한창 유명한 몬스터 사냥꾼을 뒤쫓던 중이었다. 그를 찾아 망치의 주인인지 시험하기 전까진 이대로 죽을 수 없었다. “물러서는 게 좋을 거예요. 살아남지 못할 거거든요.” 늑대가 물러 서도록 망치를 높이 들며 경고했다. 그래도 브라이어 늑대는 요지부동이었다. 녀석은 뽀삐를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녀석에게서 왠지 모를 절박함이 느껴졌다. 순간 뽀삐는 녀석의 입가에서 끓어 오르는 거품을 보았다. 녀석은 굶주림이나 영역 본능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었다. 고통에서 벗어날 길을 원하는 것뿐이다. 늑대가 그녀를 향해 뛰어올랐다. 죽이든 죽든 마음을 정한 모양이었다. 뽀삐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육중한 망치를 휘둘렀다. 일격에 머리가 깨지며 늑대는 고통에서 해방됐다. 살상은 전혀 즐거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과 늑대 모두에게 이게 최선의 길이었을 거라고 믿었다. 휑한 들판을 둘러 보았지만 몬스터 사냥꾼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여러 해 찾아 다닌 전설의 영웅이기를 바라며 소문을 따라 도시 밖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지만 만난 거라곤 늑대나 날개 달린 용, 노상강도뿐. 게다가 목숨을 지키기 위해 대부분은 죽여야만 했다. 몇 주 동안 데마시아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촌락을 전전했다. 작은 몸으로 할 수 있는 만큼 재빠르게 걸어 다녔지만 몬스터 사냥꾼은 언제나 위대한 활약상에 대한 소문만 남기고 떠난 후였다. 요들은 보통 시간의 흐름을 잘 느끼지 않는데, 뽀삐조차도 시간이 너무 걸린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다 자기 자신과 사명에 회의감이 들려 하던 어느 날, 길가 푯말에 방이 붙어 있는 걸 보았다. “몬스터 사냥꾼 축제! 모두 대환영!” 뽀삐가 찾아다니던 그 사냥꾼을 기리는 축제였다. 그곳에 가면 수수께끼의 영웅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직접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러면 만나서 오를론이 남긴 이 망치의 주인인지 확인해 볼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녀는 새로운 목표를 가슴에 품고 축제장으로 향했다. 마을로 들어서자 왠지 긴장됐다. 길거리에는 현수막과 리본이 요란하게 달려 마을은 축제 분위기로 가득했다. 이런 축제에는 일찍 와서 사람들 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는 게 좋지만 이미 시장통에는 관중이 우글거렸다. 뽀삐는 마을 사람들의 다리 사이를 겨우겨우 지나다녔다. 사람들은 벌써 한껏 취해있어 그녀를 보지 못한 듯했다. “나타나면 내가 한 잔 살 거야.” 머리 위에서 혀 꼬부라진 소리가 들렸다. “괴물을 죽이고 내 염소를 구해줬거든.” 뽀삐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사냥꾼의 소문을 들을 때마다 그녀의 심장은 그렇게 고동쳤다. "그가 진짜 영웅이라면…"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망치를 넘겨주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새로운 목표를 찾을 수 있을까? 목표 없는 요들이 된다는 건 암울한 일이었다. 이리저리 헤매는 마음을 굳게 붙잡고 뽀삐는 눈앞의 임무로 돌아갔다. 그녀는 간신히 인파를 뚫고 다시 시장으로 돌아왔다. 오르기도 쉽고 사람들의 눈에도 잘 띄지 않는 긴 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뽀삐는 인파 너머를 볼 수 있을 만큼 기둥을 뒤뚱뒤뚱 타고 올랐다. 딱 맞춰 온 듯했다. 시장 저쪽 끝에는 사회자와 데마시아 장교 몇몇이 연단에 서 있었고 그 뒤에는 베일에 가려진 기다란 무언가가 세워져 있었다. 요들의 예민한 감각을 가진 뽀삐였지만 남자가 무어라 하는지는 아주 희미하게만 들렸다. 그는 몬스터 사냥꾼에 대해, 그가 날개 달린 용과 사나운 늑대, 노상강도와 맞서 얼마나 많은 농장과 마을을 지켜냈는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이 훌륭한 전사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를 기릴 것이라고 말했다. 사냥꾼은 몇 주 전 어웬데일 마을 근처에서 목격됐다고 한다. 누군가 처음으로 그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사회자는 베일을 당겨 그 속의 석상을 드러냈다. 드디어 사냥꾼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다니, 뽀삐는 기뻐서 기절할 지경이었다. 데마시아 전사의 귀감이 되는 그는 2미터는 족히 되는 키에 무거운 철갑옷으로 무장하고 울룩불룩한 근육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발밑에는 죽은 늑대의 몸뚱이가 널브러져 있었다. 머릿속에 사냥꾼의 모습을 열심히 새기고 있는데 갑자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저길 봐요. 사냥꾼이에요! 저기 석상이랑 똑같아요!” 눈을 휘둥그레 뜬 여자아이가 외쳤다. 뽀삐는 아이가 자신을 가리키는 걸 보았다. 뒤에 사냥꾼이 있나 싶어 몸을 돌려 쳐다보았다. 하지만 거긴 아무도 없었다. “아냐, 얘야.” 아이의 아버지였다. “몬스터 사냥꾼이 아니란다. 몸집도 절반밖에 안 되는걸.” 아이와 남자는 이제 관심이 없는지 오락거리를 찾아 떠났다. 석상 앞의 인파가 줄어들자 뽀삐는 더 자세히 보려고 다가갔다. 이제야 세세하게 볼 수 있었다. 사냥꾼의 머리는 길고 그 색은 밝았다. 양 갈래로 묶은 모습이었다. 손에는 갖은 전투 때문인지 굳은살이 배겨 있었다. 그리고 그 양손에 들고 있는 건 오를론이 남긴 것과 닮은 거대한 망치였다. 이자가 주인임에 틀림없었다. “그래, 이 사람이야. 내가 너무 늦은 게 아니어야 할 텐데.” 뽀삐는 몸을 돌려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축제의 장을 벗어나 어웬데일로 가는 지름길로 향했다. |
3. 구 배경
뽀삐는 다른 요들 소녀들과 달랐다. 친구들이 삼단뛰기 놀이를 하면서 즐거워할 때 뽀삐는 온종일 아버지의 갑옷 상점에서 무기나 갑옷을 만지고 놀았다. 손에 기름이 묻거나 굳은살이 박이는 것쯤은 상관없었다. 뽀삐는 이렇게 좀 특별한 아이였다. 아버지 블롬그런은 밴들 시티에서 가장 뛰어난 갑옷 장인이었고, 일만큼이나 어린 딸 뽀삐를 사랑했다. 뽀삐란 이름은 대장간의 불꽃이 튀어 오르는 소리를 본떠 지은 것이다. 뽀삐가 자신이 가장 아끼는 망치 '웜퍼'를 처음으로 손에 든 날. 블롬그런은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뽀삐는 곧바로 아버지의 기술을 전수받았고 이내 갑옷 제작에 천부적인 자질을 뽐냈다. 블롬그런은 딸이 훌륭한 대장장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해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플로린 버렐이라는 데마시아의 장군이 블롬그런에게 그 어떤 투구보다도 찬란한 투구를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다. 블롬그런은 최고의 작품을 플로린 장군에게 선사하겠다는 생각에 매우 들떴다. 그는 뽀삐에게 투구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인 보석 가공을 맡겼다. 뽀삐가 가공한 보석은 투구의 가장 중심에서 찬란하게 빛났다. 작업이 완료되자 부녀는 투구를 직접 전달하기 위해 데마시아를 향해 길을 나섰다. 그러나 이때, 장군이 투구를 주문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녹서스 사령부가 뽀삐 부녀를 목표로 암살자 두 명을 급파했다. 블롬그런은 뽀삐가 투구를 가지고 탈출할 수 있도록 암살자들을 몸으로 막아섰고, 뽀삐는 덤불에 몸을 숨긴 채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뽀삐는 집으로 도망치지 않고 홀로 투구를 가지고 데마시아로 향했다. 아무런 보상도 원치 않았다. 그 어떤 보상도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오직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고자 장군에게 투구를 선물했다. 플로린은 그녀의 눈물 맺힌 두 눈에서 굳건한 의지를 보았고 뽀삐를 요들의 외교관 자격으로 데마시아에 머물게 해 달라고 밴들 시티에 요청했다. 얼마 후 뽀삐는 아버지의 망치를 들고 녹서스에 복수하기로 마음먹고 리그 오브 레전드에 자원한다. 비록 체구는 작지만 뽀삐의 망치 웜퍼나 그 의지를 우습게 보아서는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