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사고 요약도 | ||||
발생일 | <colbgcolor=#fff,#191919>1987년 10월 19일 7시 5분경 (37년 주기) | |||
사고 유형 | 충돌사고 | |||
사고 원인 | 배차원의 과실, 규정위반 | |||
사고 지점 | 인도네시아 남자카르타 폰덕 비퉁 빈타로 km 17+252 | |||
피해 | 인명 | 사망 156명 경상 254명 | ||
차량 | BB 303 16, BB 306 16, KB3, K3 | |||
운영기관 | 인도네시아 철도공사 | |||
사고 열차 A | 열차 번호 | KA 220 | ||
출발역 | 랑카스비퉁선 타나아방역 | |||
종착역 | 메락선 메락역 | |||
사고 열차 B | 열차 번호 | KA 225 | ||
출발역 | 랑카스비퉁선 랑카스비퉁역 | |||
종착역 | 보고르선 자카르타 코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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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7년 10월 19일 인도네시아 남자카르타의 폰덕 비퉁 빈타로에서 일어난 열차 정면 충돌사고.2. 사고 전개
1987년 10월 19일 아침, BB 303 16 기관차[1]가 견인을 하는 Tanah Abang(타나아방)발 Merak(메락)행인 220번 열차[2]엔 승객 500여명이 탑승한 상태로 Tanah Abang(타나아방)역에서 발차하여 다음역인 Kebayoran(케바요란)역으로 향했다.또 다른 열차는 BB 306 16 기관차[3]가 견인을 하는 Rangkas Bitung(랑카스비퉁)발 Jakarta Kota(자카르타 코타)행인 225번 열차[4]는 승객 700여명이 탑승 했었다. 열차는 승객칸을 가득 채우고도 700여명을 태우기엔 모자란 상태라 승객들은 열차 위에 올라타거나, 아예 매달린 채 가거나, 기관차 창문 바로 앞에 앉은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225번 열차는 Rangkas Bitung(랑카스비퉁)역에서 발차하여 다음역인 Serpong(서퐁)역으로 향했다.
한편 220번 열차는 6시 25분에 다음역인 Kebayoran(케바요란)역에 진입하여 1번 선로에 정차했다.
또 한편 225번 열차는 다음역인 Serpong(서퐁)역에 정차를 하고 또 다음역인 Sudimara(수디마라)으로 향했다. 당시 서퐁(Serpong)역 배차원은 Sudimara(수디마라)역의 배차원인 Djamhari(잠하리)[5]에게 확인도 안한 채 225번 열차를 발차시켰다.
또 한편 Sudimara(수디마라)역은 사람들로 꽉 찼다. 6시 35분 251번 열차는 발차를 하였고, 이어서 1035번 화물열차가 2번 선로에 정차를 했다. Sudimara(수디마라)역 측은 곧 진입할 225번 열차가 6시 40분에 정차하면은 6시 49분에 Kebayoran(케바요란)역에서 대기하고 있는 220번 열차와 교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예정과 달리 225번 열차는 5분 지연되어 6시 45분에 Sudimara(수디마라)역으로 진입을 하였고, 3번 선로에 정차를 하였다. 그렇게 되면 Kebayoran(케바요란)역에 대기하고 있는 220번 열차가 우선 발차를 하는데 그러면 220번 열차와 225번 열차가 Sudimara(수디마라)역에서 교행을 해야하기 때문에 선로를 비워야 하는데 선로는 전부 꽉 차는 바람에 교행이 불가능해진다[6]. 그래서 Sudimara(수디마라)역의 배차원인 Djamhari(잠하리)는 공식 규정에 따라 이와 같은 수행을 해야한다. [7] 하지만 당시 Sudimara(수디마라)역의 배차원인 Djamhari(잠하리)는 225번 열차 기관사인 Slamet Suradio(슬라멧 수라디오)에게 교행 장소 변경 허가서(PTP)[8]를 Kebayoran(케바요란)역 배차원에게 사전 허가를 받지 않고서 전달했고, 그리고 당시 Kebayoran(케바요란)역의 배차원인 Mad Ali(매드 알리)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역인 Kebayoran (케바요란)역에서 교행을 요청했는데 Kebayoran (케바요란)역 배차원인 Mad Ali(매드 알리) 수락을 하였다.
한편 다음 역인 Kebayoran(케바요란)역에서 220번 열차가 대기 중일 때 Kebayoran(케바요란)역 배차원인 Mad Ali(매드 알리)가 당시 Kebayoran(케바요란)역의 교대 배차원인 Umriyadi(움리야디)에게 251번 열차, 1035번 열차, 225번 열차가 아직 진입을 안했다고 전한 다음 교대를 하였고, 6시 45분에 전 역인 Sudimara(수디마라)역에서 발차한 251번 열차는 다음역인 Kebayoran(케바요란)역에 정차를 하고 교대 배차원인 Umriyadi(움리야디)는 Sudimara(수디마라)역 배차원에게 전화를 걸어 220번 열차 출발 요청을 했지만 Sudimara(수디마라)역 배차원은 거절을 하였다. 하지만 Kebayoran(케바요란)역 교대 배차원인 Umriyadi(움리야디)는 그냥 6시 50분에 220번 열차를 발차 시켰다. Kebayoran(케바요란)역 교대 배차원인 Umriyadi(움리야디)는 다시 Sudimara(수디마라)역 배차원인 Djamhari(잠하리)에게 전화를 걸어 KA 220 열차 발차 했다고 전달했다.
Sudimara(수디마라)역 배차원인 Djamhari(잠하리)는 충격을 먹었고, 당시 대기하고 있는 225번 열차를 3번 선로에서 1번 선로로 옮기라고 역 직원에게 지시를 내렸지만 6시 52분에 225번 열차는 발차 허가도 없이 멋대로 발차를 하였다. 역 직원은 Sudimara(수디마라)역 배차원인 Djamhari(잠하리)에게 225번 열차가 발차 했다고 전달했는데 Sudimara (수디마라)역 배차원은 그 소식을 듣고, 더 충격을 먹었다.
Sudimara(수디마라)역 배차원인 Djamhari(잠하리)는 완목 신호기로 신호를 줬지만 승객에 가려져 기관사는 보지 못했다. 그래서 Sudimara (수디마라)역 배차원인 Djamhari(잠하리)는 급히 달려가 빨간 깃발을 흔들며 멈추라 경고했다. 그리고 직원 1명을 오토바이에 태워 보내 경고하려고도 했으나, 열차를 따라 잡는데 실패했다. 두 열차 사이에 무전기도 없어 서로 통신도 불가능했다. 두 열차는 같은 노선에서 서로를 향해 달리고 있는데 선로는 단선이라 사고를 피할 조차도 없었다. 그 사고 장소는 곡선 구간이 있는데다 주변에 장애물도 많아 두 열차는 충돌 직전까지 서로를 보지 못했다. 서로를 향해 달리던 두 열차는 결국 오전 7시 5분, 남자카르타 폰덕 비퉁 빈타로 인근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사고로 최소 139명이 사망했다. 기록에 따라 실종자 수를 포함해서 사망자 수는 156명까지 올라간다. 254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양측 기관사는 정면 충돌 직전 열차에서 뛰어내려 중상을 입었으나 간신히 살아남았다. 비슷하게 열차에서 뛰어내려 간신히 살아남은 승객들도 있었다.
3. 사고 원인
사건 당시 Sudimara (수디마라)역의 선로가 다 꽉 찬 상황을 모르고 Kebayoran (케바요란)역의 배차원인 Umriyadi (움리야디)는 KA 220 열차를 발차 시켰기 때문에 Kebayoran (케바요란)역의 배차원의 과실로 밝혀졌다. 그리고 KA 225 차장과 기관사인 Slamet Suradio(슬라멧 수라디오)는 Sudimara (수디마라)역 배차원인 Djamhari (잠하리)의 발차 허가도 없이 발차를 했기 때문에 규정위반으로 밝혀졌다.4. 사고 이후
재판에서 Kebayoran (케바요란)역의 배차원인 Umriyadi (움리야디)와 Sudimara(수디마라)역의 배차원인 Djamhari(잠하리)는 10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고, 225번 열차 차장인 Adung Syafei(아둥 사페이)는 225번 열차가 멋대로 발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차 명령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징역 2년 5개월을 선고 받았고, 225번 열차 기관사인 Slamet Suradio(슬라멧 수라디오)는 1988년에 징역 5년형을 선고 받았고, 기관사로써 해임을 당해야 했다. 그는 시피낭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형량이 3년 5개월로 변경되어 1993년에 석방을 하였으나, 인도네시아 교통부에 의해 법령 No. 4/KP.602/PNB-96으로 20년 넘게 일한 회사에서 퇴직금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해고를 당했다. 이 후, Slamet Suradio(슬라멧 수라디오)는 고향으로 돌아가 담배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사고에 휘말린 기관차 2대는 심각하게 손상을 입어 폐차 처리 되었으며 사고 이후 인도네시아 철도에선 열차간에 무전 시스템을 설치해 열차끼리, 그리고 열차와 역이 더 소통하기 편하게 했다. 또한 경고 시스템을 더 확장하고, 사고 구간은 복선으로 만들어 정면 충돌 가능성을 없앴다.
2013년 12월 9일에 또 다시 사고 장소 근처 건널목에서 충돌하여 화재사고가 났다. [9]
2022년 7월 11일에 또 다시 사고 장소 근처 건널목에서 오토바이와 통근열차와 충돌해 오토바이 운전자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10]
2023년 7월 25일에 또 다시 사고 장소 근처에서 한 트럭이 전차선과 부딪혀 기울어지는 사건이 있었다.[11]
사고 이후 매년 10월 19일이 될 때마다 사고 장소에서 현수막을 걸어서 추모를 한다.[12]
==# 대중매체 #==
- 노래
1988년 1월 1일에 인도네시아의 가수인 Iwan Fals (이완 팔스)가 "1910"이란 제목으로 빈타로 열차 충돌 사건을 애도하는 노래를 발매했다.
1910 (Iwan Fals) 가사 Apa kabar kereta yang terkapar di Senin pagi? 월요일 아침에 흩여져 있는 열차는 무슨일이야? Di gerbongmu ratusan orang yang mati 너의 객차에 수백명이 죽었있어 Hancurkan mimpi bawa kisah 이야기가 있는 꿈을 부셔버렸어 Air mata... Air mata... 눈물... 눈물... Belum usai peluit, belum habis putaran roda 경적이 끝나기 전 바퀴의 회전이 멈추기 전 Aku dengar jerit dari Bintaro 나는 빈타로의 비명을 들었어 Satu lagi catatan sejarah 한번 더 역사에 기록됐어 Air mata... Air mata... 눈물... 눈물... Berdarahkah tuan yang duduk di belakang meja? 책상 뒤에 앉은 주인은 피가 있을까? Atau cukup hanya ucapkan belasungkawa? 또는 단지 애도를 표현 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Aku bosan 나는 지겨워 Lalu terangkat semua beban di pundak 그리고나서 어깨위에 모든 짐이 들어올려져 Semudah itukah luka-luka terobati? 그것이 치료되는 상처들 처럼 쉬운건가? Nusantara 누산따라 Tangismu terdengar lagi 너의 울음이 다시 들린다. Nusantara 누산따라 Derita bila terhenti 고통은 언제 멈출까? Bilakah? Bilakah? 언제일까? 언제일까? 19 Oktober tanah Jakarta berwarna merah 자카르타 땅의 10월 19일은 붉은색이었어 Meninggalkan tanya yang tak terjawab 응답없는 질문만 남겨놓다 Bangkai kereta lemparkan amarah 기차의 잔해는 분노를 부른다 Air mata... Air mata... 눈물... 눈물... Nusantara 누산따라 Langitmu saksi kelabu 너의 하늘은 빛바랜 목격자 Nusantara 누산따라 Terdengar lagi tangismu 너의 울음이 다시 들려와 Nusantara 누산따라 Kau simpan kisah kereta 너는 기차의 이야기를 간직해 Nusantara 누산따라 Kabarkan marah sang duka 슬픔의 화를 알려 Saudaraku, pergilah dengan tenang 내 형제여 평온으로 가라 Sebab duka sudah tak lagi panjang 슬픈 이유는 이미 더는 길지 않아 Saudaraku, pergilah dengan tenang 내 형제여 평온으로 가라 Nusantara (X4) 누산따라 (X4) pergilah dengan tenang Saudaraku 평온으로 가라 내 형제여 Saudaraku, pergilah dengan tenang 내 형제여 평온으로 가라 Nusantara (X2) 누산따라 (X2) Saudaraku, pergilah dengan tenang 내 형제여 평온으로 가라 Sebab duka sudah tak lagi panjang 슬픈 이유는 이미 더는 길지 않아 Saudaraku 내 형제여 Nusantara (X4) 누산따라 (X4) |
* 영화
1989년 5월 4일에 Buce Malawau (부스 말라와우) 감독의 작품인 "Tragedi Bintaro (빈타로의 비극)"이란 제목으로 빈타로 열차 충돌
사건 배경으로 영화를 개봉했다.[13]
(영화 사고장면 편집본 : Tragedi Bintaro (movie mode))
(영화 풀버전 : Film Tragedi Bintaro (1989) FULL MOVIE)
2013년 10월 17일에 Wishnu Kuncoro (위시누 쿤코로) 감독의 작품인 "Dendam Arwah Rel Bintaro (빈타로 영혼의 복수)"라는 제목으로 빈타로 열차 충돌사건으로 인해 유령이 됐다는 실화를 배경으로 영화를 개봉했다.[14]
5. 관련, 유사 사고
[1]
BB 303 16 기관차는 독일의 Henschel(헨첼)이 제작해 1975년에 도입 되었고, 현재는 폐차 처리 되었다.
[2]
사고 날짜 당시 220번 열차의 편성이다.
[3]
BB 306 16 기관차는 BB 303 16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Henschel(헨첼)이 제작해 1984년에 도입 되었고, 현재는 폐차 처리 되었다.
[4]
사고 날짜 당시 225번 열차의 편성이다.
[5]
Djamhari(잠하리)는 1980년대 부터 1994년까지 Sudimara(수디마라)역의 배차원이었다.
[6]
당시 Sudimara(수디마라)역의 상황이 이랬었다.
[7]
Kebayoran(케바요란)역 배차원에게 전화해서 교행 변경 허가를 요청하고, 225번 열차 기관사와 차장에게 (PTP) 즉 교행 장소 변경 허가서를 전달한다.
[8]
그 사건 당시의 교행 장소 변경 허가서(PTP)다. 현재는 전직 225번 열차 기관사인 슬라멧 수라디오가 소유를 하고 있어 아직까지도 남겨져 있다.
[9]
(참고 :
빈타로 열차 충돌사고(2013))
[10]
[11]
[12]
[13]
"Tragedi Bintaro (빈타로의 비극)" 포스터
[14]
"Dendam Arwah Rel Bintaro (빈타로 영혼의 복수)"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