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06:55:36

비토리오 스토라로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비토리오 스토라로
Vittorio Storaro
출생 1940년 6월 24일 ([age(1940-06-24)]세)
라치오 로마
국적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직업 촬영 감독
활동 1960년 – 현재

1. 개요2. 상세3. 일부 필모그래피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 출신의 촬영 감독. 역대 최고의 영화 촬영 감독 중 하나로 여겨진다.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와 오랫동안 같이 작업을 했다. < 지옥의 묵시록>, < 레즈>, < 마지막 황제>로 아카데미 촬영상을 3번 수상했다.

2. 상세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있는 촬영감독으로 꼽힐 정도로 시대의 흐름과 기술의 흐름, 촬영에 대한 접근 방식을 바꿔놓은 대단한 인물. 그는 자연광과 조명의 차이점을 깊이 연구하여 이 두가지를 적절히 혼합한 아름다운 영상을 찍어내는 인물로 유명하다. 그의 영화를 보면 조명인가 싶었던 게 자연광이고, 자연광인가 싶었던 게 조명인 경우가 종종 있다. 자연광인데 매우 화사하고 스타일리쉬하며, 인공조명인데 매우 자연스러운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화려했던 인물로 그가 30살에 찍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 순응자〉는 초기작인데도 그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굉장히 압도적인 영상미를 보여줬다. 또한 동시기에 내놓은 다리오 아르젠토의 수정 깃털의 새 역시 스토라로의 명성을 올려주는데 성공했다.

그는 이탈리아 국립 필름 스쿨에 18살이란 당시로선 그리고 현재까지 최연소인 나이로 입학했었는데 #, 이 학교 자체가 경쟁률이 어마어마한 곳이기에 이는 더욱 주목할만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학교 입학 전에 필름현상소에서 일하면서 현상에 관한 각종 화학기술을 익혔는데, 후에 그는 이때 배운 것을 바탕으로 70년대 ENR 기법을 영화계에 널리 보급했다.

순응자의 화려한 영상미에 반해 코폴라는 그에게 지옥의 묵시록을 제안하고, 이 작품을 바탕으로 스토라로는 할리우드로 무대를 옮겨 활동하게 된다. 이 당시 코폴라는 스토라로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대부 3편을 찍을 때, 고든 윌리스가 아닌 스토라로와 함께 찍으려고까지 했다. 결국엔 고든 윌리스와 다시 찍긴 했지만 고든 윌리스는 이 당시 굉장히 빈정이 많이 상했다고 한다.

비록 지옥의 묵시록은 1975년에 찍었으나 편집하는데 오랜시간이 걸려 79년에야 공개됐지만, 그 작품 덕에 스토라로는 비록 70년대 후반 계속 미국 영화를 찍어 왔음에도 지옥의 묵시록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큰 주목을 얻었다. 그리고 그 덕에 다음 해에도 그가 당대의 대스타 워렌 비티와 찍은 레즈 또한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하게 된다. 80년대는 그야말로 그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데, 그의 명성 덕에 그는 자신의 예술적 비전에 어마어마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절정은 마지막 황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후로도 그는 예술적으론 훌륭한 업적을 이뤘지만, 근본적으로 훌륭한 촬영은 영화 내용 자체의 완성도, 그리고 대중의 호응과 별개로 평가될 수는 없는 부분이기에 이 작품이 그의 경력에서 최고 지점으로 일컬어진다. 왜냐하면 마지막 황제로 3번째 아카데미 상을 수상하였기 때문인데 이때까지 그 어떤 배우나 감독, 각본가도 3번이나 수상한 전례가 없었다(14, 15, 16년도에 엠마누엘 루베즈키가 3년 연속 촬영상을 타며 기록 갱신).

문제는 그가 이렇게 커지면서 그의 존재가 점차 부담스러워지기도 했다. 한 예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베르나도 베르톨루치의 ‘리틀 부다’에서 스토라로는 과거 부처의 이야기는 70mm 필름으로 찍고, 현재는 35mm 필름으로 찍었는데, 이 때 70mm 필름의 고운 그레인과 선명도에 크게 감명을 받아 앞으로 자기는 모든 영화를 70mm 필름으로만 찍겠다고 선언했었다. 물론 그건 제작비가 터무니없이 많이 요구되는데, 이 후 작품 중 어떤 것도 그는 70mm 필름으로 찍지 못했고, 첫작품부터 쭉 함께해 온 베르나로도 베르톨루치도 더 이상 그와 함께 일하지 않게 됐다. 베르톨루치는 오히려 이후 작은 규모의 소박한 소재의 영화들로 돌아갔다.

90년대 스토라로는 더이상 할리우드에서 영화 제안을 못받게 되는데 이는 그가 제작자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바로 유니비즘(Univisium) 때문인데, 90년대 개발되던 HD TV를 본 스토라로는 극장과 안방 TV의 화면비율을 통합하겠다는 유니비즘을 선포한다. 그는 가장 완벽한 화면비율은 자신이 연구해본 결과 2:1이라며 앞으로 나올 영화와 TV물의 일반적은 2:1로 찍혀질 것이라 주장했다.

문제는 당시 2:1 화면 비율을 상영할 수 있는 극장이 세계적으로 많지 않았다. 사실 유니비즘 자체는 1950년대에 이미 몇몇 할리우드 영화에서 도입되었으나, 이런 문제 때문에 프리츠 랑이나 더글러스 서크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잘 쓰이지 않았다. 그는 2:1 화면비율의 영화를 애너모픽 렌즈를 써서 찍는 것이 아니라 2 perf 카메라로 찍었었다. 말 그대로 필름의 절반만 사용하는 카메라로 이 카메라로 찍으면 똑같은 필름도 일반 카메라보다 두배는 더 활용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일반적인 영사기로는 이 필름을 상영할 수 없기에 이 필름을 위한 특별한 영사기가 필요한데 이 영사기는 대부분이 이탈리아의 일부 지역에만 있었다. 헐리우드에서는 미국 대부분의 극장에서 상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영화를 찍어야 한다고 주장을 하니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흥미로운 점은 근래 넷플릭스에서 방영되는 작품들. 마인드 헌터, 스트레인져 씽즈 등을 보면 화면비율이 2:1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토라로가 예견한대로 와이드TV가 보급되자, 2:1로 영화와 TV 시리즈들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다 촬영한 영화를 홈 비디오로 작업하면서 화면비와 색감을 훼손해서 욕을 들어먹기도 했다. 대중적으로는 지옥의 묵시록 유니비즘 화면비 강제 변경 사태가 가장 유명하다. 이외에 다리오 아르젠토 수정 깃털의 새 DVD 발매 당시에도 스캔들급으로 흉한 트랜스퍼를 내놓는 바람에 홈비디오 업계와 시청자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까였다.[1] 보통 영화 복원 작업에서는 감독이나 촬영 감독을 모셔오는게 품질 보증으로 여겨지는데, 스트라로는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믿고 거른다는 이미지가 생겨버렸다.

헐리우드 영화라도 스토라로는 오로지 자신이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현지 스탭으로만 주요보직을 꾸릴 것을 요구했고, 헐리우드 영화처럼 오랜시간 동안 촬영하는 것을 거부하고 굵고 짧게 일할 것을 요구했다(이 당시 할리우드 영화 평균 촬영시간이 16시간인데, 스토라로는 10시간을 요구). 거기다 후반작업도 그에게 통제권을 줘야 했는데, 이 때 절대 그에게 서두를 것을 요구해선 안되며, 그 과정에서 발생되는 소유권이나 프린트들도 스토라로가 가져야한다고 요구했다.

당연히 이런 요구는 그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먹힐리가 없어서 90년대 들어서 거의 아무도 그를 고용 안 했는데, 가끔 몇편씩 그가 찍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제작자가 허술해서 이런 조항이 있는지 확인도 안하고 그와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폴 슈레이더의 말에 의하면 오랜 시간 동안 촬영을 못한다는 그의 계약조건에도 불구하고, 그의 우려와 달리 촬영은 지연되는 것 없이 굉장히 순조롭게 진행됐다고 한다. 왜냐마면 스토라로는 2팀으로 나눠서 하나의 팀이 촬영을 끝내기 전에 다음 팀이 준비를 이미 다 마쳐 놓고, 또 모든 조명을 디머 보드에 연결해놔서 카메라가 돌아가는 와중에도 조명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좌우로 움직이며 밝기 또한 수시로 바뀌어, 그의 감독 경력 중에서 유일하게 현장에서 기다려 본 적 없이 끊임없이 촬영이 계속 진행됐다고 한다.

최근 들어 그는 우디 앨런 덕에 다시 할리우드로 복귀했는데, 흥미롭게도 그는 필름이 아닌 디지털 카메라로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이미 코폴라와 1980년도에 최초의 HD카메라가 나오자마자 그 걸로 영화를 찍어봤던 사람이니, 이는 그렇게까지 이례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조명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LED는 빛의 파장과 표현력이 텅스텐보다 부족하고, 불안정하단 이유로 절대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란 점을 생각해보면 여전히 파격적인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더이상 필름 후반작업과 보급문제에 관련된 퀄리티 유지 문제로 영화사와 싸우기도 질려서 그런건지 모르겠다.

그가 선택한 카메라는 소니 베니스인데, 사실 이전까지는 소니 베니스는 그렇게 주류에서 사용되던 카메라가 아니었는데, 스토라로 덕인지, 할리우드에서 소니 베니스를 사용해 영화를 찍는 추세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3. 일부 필모그래피

< 순응자>,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1970
<마지막 탱고>,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1972
<1900>,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1976
< 지옥의 묵시록>,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1979
< 레즈>, 워렌 비티, 1981
< 마지막 황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1987
<딕 트레이시>, 워렌 비티, 1990
<카페 소사이어티>, 우디 앨런, 2016


[1] 아르젠토는 고전 홈비디오 업계에서 인기 보증 수표로 꼽히는 감독이다.